카카오톡 채널 추가 버튼
공공(空空)의 시선
728x90

인상 깊은곳/서원_향교 45

영천 임고서원,포은 유물관

임고 서원 둘레길을 걸은 뒤 임고서원을 잠시 둘러봤다 임고 서원은 누구나 아는 '단심가"의 고려말 충신 포은 정몽주를 기린 서원이다 우리나라 서원 중 영주의 소수서원에 이어 두 번째 사액서원이다 임고 서원에 들어 서면 높이 약 20m, 둘레 약 6m에 이르고 나이가 약 500여 년이 되는 은행나무가 볼만하고 개성의 선죽교를 전통방식으로 재현해 놓았다 ☞ 임고 서원 임고서원은 1553년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정몽주의 덕행과 충절을 기리기 위해 임고면 고천동에 창건된 서원이다. 1554년에 [임고]라 사액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03년 현재의 위치로 이건 하고, 이듬해에 다시 사액되었다. 1643년에 장현광과 1787년에 황보인을 추가 배향하여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

의성 빙계서원, 빙산사지 오층석탑

빙계 계곡으로 내려가지는 못하고 계곡 길을 둘러보다가 빙계 서원이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일행이 쉬는 동안 난 서원과 반대편에 있는 오층석탑을 보러.. ▶ 빙계 서원 신원록(申元祿)이 그의 스승 주세붕(周世鵬)이 우리나라 최초로 백운동에 서원을 세워 인재를 양성할 때, 그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돌아와 백씨인 정은 신원복(申元福)과 상의하여 인재교육을 위해 장천(長川) 위에다 터를 잡아 서원을 짓기 시작했다. 1566년(명종 11) 장천 서원(長川書院)이 의성읍에 건립되었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자 7년 뒤인 1600년(선조 33) 유림에서 현재 위치로 옮기기로 결정하고, 이듬해 원묘(院廟)를 준공하고 원액(院額)을 ‘빙계(氷溪)’로 고쳤다. 이때 이언적을 김안국과 함께 제향하였으며, 1689년(숙종 1..

달성 육신사

하목정을 보고 휴가 마지막 탐방지로 '육신사'를 찾았다 블로그 이웃께서 육신사 가는 길 배롱나무가 좋았다고 한 게 생각이 나기도 했고 찾은 지 6년이 되니 다시 찾고도 싶었다 육신사 가는 길 배롱나무 날이 더워 육신사 구석구석은 자세히 살펴보질 못했다 육신사에 대한 내용은 지난 글을 보아도 무방 할 듯싶다 지난 썼던 글 이상 쓸 이야기가 없다 ☞ https://xuronghao.tistory.com/554

(대구 동구)신숭겸 장군 유적지 그리고 배롱나무

2019년 4월 팔공산 갔다가 내려오는 길에 이곳을 들렀다가 배롱나무가 필 때 다시 오겠다 한 것을 까맣게 잊고 있다가 '두가"님 블로그 글을 보고 생각이 나 들러 보았다 예전에 찾았을 때는 이곳을 찾는 분들이 없었는데 이번에는 사진을 찍으시는 분들을 비롯 적지 않은 분들이 찾고 계셨다 대구 인근에서는 배롱나무가 가장 잘 피어 있고 오래 된 곳이지 싶다 ☞ 대구광역시 기념물 신숭겸장군유적 (申崇謙將軍遺蹟) 고려의 개국공신인 신숭겸을 기리는 유적이다. 신숭겸(∼927)은 평산 신씨의 시조로서, 918년 배현경, 홍유, 복지겸 등과 함께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추대하여, 고려의 건국에 이바지한 인물이다. 고려 태조 10년(927) 대구 공산에서 후백제 견훤의 군대와 싸우다가 태조가 적군에게 포위되어 위급해지..

( 대구 달성 ) 귀화 장수 김충선 (사야가)의 달성한일우호관,녹동서원

아트 도서관에 들렀다가 바로 근처 녹동서원이 있는 게 생각이 나 잠시 들렀다 달성한일우호관과 녹동서원은 2015년 들렀으니 근 6년 만에 다시 찾은 거다 https://xuronghao.tistory.com/338 ( 대구 달성) 녹동서원 그리고 달성한일우호관 대구 근교 청도 방향으로 달성 가창면 우록리에는 "징비록" 드라마로 재조명된 임진왜란 당시 3천명의 병력을 이끌고 투항,조선으로 귀화한 일본인 장수 사야가 ( 한국명: 김충선) 를 모신 서원 xuronghao.tistory.com 이곳은 그간 많은 드라마에 조금씩 언급되었던 일본의 귀화 장수 김 충선 ( 일본 명 사야가 )을 모신 서원이고 기념관이다 김충선은 임진, 병자 전쟁과 이 괄의 난에 큰 공을 세우고 이곳 달성 가창 우록리에 세거지를 정해 ..

대구의 서원-구암 서원

구암 서원은 도심 속에 있는 몇 안 되는 서원이다 주거지와 가까이 있는 서원 이어 가끔 찾는다 생각을 하는데도 그 가끔이 몇 년에 한 번이다 블로그에도 올린지 한참 되었다 ☞ https://xuronghao.tistory.com/618 ( 대구 ) 도심속의 서원-구암서원, 숭현사 대구 도심에 있는 서원 구암서원 이곳을 몇번이나 방문하였는데 매번 문이 잠겨 있어 돌아섰었다 문중에 전화를 해 볼까도 생각했었지만 귀찮은 일이 생길까봐 늘 발길을 돌렸었다 오늘도 문이 xuronghao.tistory.com 연암공원, 연암산을 찾은 김에 잠시 들러 보았다 ☞ 구암서원 연혁 구암서원은 1665(顯宗6)년 連龜山(연구산) 서남쪽(현 대구 초교 서남쪽 언덕)에 崇賢祠(숭현사)를 건립하고 대구부민이 龜溪(諱沉)선생을 祭..

( 옥천 여행 ) 옥천 향교,옥주 사마소

옥천 구읍은 볼 만한 곳들이 모여 있어 충분히 걸으면서 볼 수가 있다 옥천 향교는 지나치기가 쉬운데 여느 향교와 다른 점이 있어 보고 가면 좋다 ▶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옥천향교 (沃川鄕校) 조선 태조 7년(1398)에 처음 지은 후 임진왜란(1592)으로 불타 없어진 것을 다시 지었으며, 1961년에 황폐한 향교를 복원하였다. 1966년과 1974년에 보수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금 남아있는 건물은 대성전(충청북도문화재자료 제214호)과 명륜당·동재·서재·내삼문·외삼문·고직사 등이다. 건축형태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태이다. 명륜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이다. 옥천 향교는 입구가 명륜당이어 특이하다 입구가 명륜당인 향교는 처음 본다 내삼문도 독특한 모습이다 서재, 동재는 공사중이었다..

( 구미 문화재 답사 여행 ) 금오서원

금오 서원은 감천과 낙동강이 만나는 근처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1600년대에 지어 진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새 건물 같았다 이렇게 잘 보존 되어 있는 서당은 처음이다 다시 지은 것인지 확인을 해 봐야 할 정도다 ☞ 경상북도 기념물 금오서원 (金烏書院) 지정(등록)일 1985.10.15 소 재 지 경북 구미시 선산읍 원리 276번지 야은 길재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길재(1353∼1419)는 정몽주·이색과 함께 고려 후기에 절의를 지킨 ‘고려삼은(三隱)’으로 불리는 학자이다. 그는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올랐으나 고려가 망하는 것을 알고 두 왕조를 섬길 수 없다 하여 관직을 버리고 고향에 은거하였다. 조선이 건국되고 세자 이방원(태종)이 관직에 임명하였으나 거절하고 학문과 후학양..

( 경북 구미 선산 문화재 답사 ) 선산읍성-선산 향교-선산 객사

국보 죽장리 5층 석탑을 보고 근처의 문화재를 조금 더 답사하기로 했다 이런 경우 종이 지도를 보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다 종이 지도가 없을 때는 차량 내비게이션의 주변 탐색--> 명승고적 기능을 이용하면 좋다 오늘은 돌아 가는 시간을 감안 해 돌아가는 길을 기준으로 선산, 해평 지역의 문화재를 보고 가기로 한다 선산읍은 예전에는 구미를 하부 행정 조직으로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은 그 반대가 된 곳이다 처음 답사지는 선산읍의 관문 선산 읍성의 남문이다 ☞ 선산읍성-남문-낙남루 善山邑城-南門-落南樓 조선조 500년 동안 선산 도호부와 선산군의 관문이었던 선산 읍성은 고려말에 토성으로 축조 되었다가 조선시대에 와서 석성으로 고쳐 축조하였다는 기록에 의하면 둘레가 1448척. 높이가 9척으로 동서남북 4문이 있..

( 함양 여행 ) 황암사, 청계 서원

마지막 정자인 농월정까지 가야 선비문화 탐방로가 마무리되는데 날씨가 더워 힘드신지 그만 걷자 하신다 황암사 앞에서 버스를 타고 거연정으로 돌아 가기로 했다 버스 타는시간까지 여유가 있어 황암사를 돌아본다 황암사는 절이 아니고 호국 선열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 황암사 조선(朝鮮) 선조(宣祖) 30년(1597) 정유재란 때 황석산성을 지키기 위하여 왜적과 싸우다 순국한 호국선열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황석산성 전투는 정유년(1597)에 조선을 다시 침략한 왜군 14만 명 중 우군 2만 7천 명이 8월 16일(음력)에 가또(加藤淸正), 구로다(黑田長政) 등의 지휘로 황석산성을 공격하면서 일어난 3일간(8월 16일∼8월 18일)의 처절한 공방전이었다. 이때 안의현감 곽준(郭埈)과 전 함양군수 조종도(趙宗道)..

함양 남계서원-유네스코 등재 서원

선비 문화 탐방로 트레킹을 마치고 볕이 뜨거워 더 걷지는 못하고 돌아가는 길에 남계 서원만 보고 가기로 했다 함양까지 왔는데 남계 서원은 안 보고 가면 섭섭하다 ☞ 남계 서원 ( 사적 제 499호 ) 유네스코 세계유산목록에 등재된 9개 서원중의 한 곳이다 함양 수동면 원평리 소재로 조선 명종 7년(1552)년에 개암 강익(姜翼)이 문헌공 정여창(鄭汝昌)을 기리기 위하여 창건하고 남계서원이라 칭하였다 명종 21년(1566)에 나라에서 ‘남계’라는 사액을 내려 공인과 경제적 지원을 받게 되었다. 정유재란(1597)으로 불타 없어진 것을 선조 36년(1603)에 나촌으로 옮겨지었다가, 광해군 4년(1612) 옛 터인 지금의 위치에 다시 지었다. 숙종 때 강익과 정온을 더하여 모셨다. 따로 사당을 짓고 유호인과..

군위 양산 서원 그리고 전통 혼례

친구 자녀 결혼식이 서원에서 전통 혼례로 있다 해서 참석하게 되었다 축의만 전할 수도 있지만 야외에서 하는 전통 혼례이기도 하고 근처의 국보도 볼 겸 해서 다녀왔다 전통 혼례의 장소는 군위의 양산 서원 양산 서원은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빈터만 남아 전해오던 곳을 2014년에 146년만에 복원했다고 한다 정조 10년인 1786년 군위군 부계면에 설립된 사립교육기관으로 고려 말 문신 홍노(洪魯)와 조선 전기 문신 홍귀달(洪貴達), 홍언충(洪彦忠)을 배향하다가 고종 5년인 1868년에 훼철됐다. 2008년부터 14억여원의 예산을 투입해 내삼문, 입나재, 구인재, 읍청루 등으로 구성되는 서원을 모두 복원했다고 한다 ( 2014.4.29 연합뉴스 인용 ) 양산이란 이름은 배향된 정조시대의 선비 홍로가 수양산(..

도심 속 향교-대구향교

대구 향교를 근 5년 반 만에 다시 찾았다 2015년 찾을때만 해도 생각은 자주 오게 될 것 같았는데 그러질 못했다 xuronghao.tistory.com/270 ( 대구 가볼만한곳 ) 대구 향교 그리고 칠곡 향교 예전에는 관심도 없었고 거들떠 보지도 않았었는데 요즘 들어 관광,유적지를 가끔 찾다 보니 향교나 서원에 대해 조금씩 관심이 간다 향교는 쉽게 이야기해서 고려시대부터 있어 온 국립 지방 xuronghao.tistory.com 이번에 어릴때 추억이 있던 동네를 한 바퀴 돌아보면서 처음 시작을 이곳 대구 향교서 시작했다 어릴 때도 향교 안은 잘 들어가지 않았었고 향교 앞을 지나치기만 했었다 대구향교는 여타 다른 향교보다 비교적 넓은 면적이고 시내 중심지에 있어 접근성은 아주 좋은 편이다 ▶ 대구 향..

대구 신서혁신도시 선사유적공원 ( 동호유적공원),동호 서당

반야월 연근 단지를 갔다가 집으로 가는 길에 혁신 도시를 잠깐 들렀다. 아내는 모자라는 달리기 운동을 좀 더 하고 난 주변 볼만한것들을 찾아 나섰다 그러다 찾은곳이 동호 유적공원이다. ▶ 동호 유적 공원 대구 신서혁신도시 택지 개발지구내에서 발굴, 조사된 문화유적중 대표적인 청동기시대 지석묘(고인돌)와 석관묘를 원형 그대로 이전. 전시형으로 이를 영구히 보존할 수 있도록 조성한 곳이다. 이곳 대구 신서혁신도시 지구는 팔공산괴에서 남쪽(금호강)으로 뻗어 내리는 많은 구릉들의 끝단이자 곡부에 의해 형성된 선상지역 중적 평야지대에 자리를 잡아 입지적 환경이 매우 좋은 곳으로 청동기 시대 이래로 조선시대와 근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삶의 흔적들이 남아서 조사 되었다. 조사 결과 청동기 시대의 주거지와 분묘, 원삼국..

( 창녕 여행 ) 창녕 향교

창녕여행의 마지막은 향교를 보고 가기로 한다시간이 더 있었다면 근처의 문화공원과 사직단,고분군을 보고 갈건데 오늘 많이 걷기도 해서 다음 기회로 미루었다 향교는 훌륭한 유학자를 제사하고 지방민의 유학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나라에서 지은 교육기관이다 ▶ 창녕 향교 (昌寧 鄕校)-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12호 창녕향교를 언제 세웠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조선 효종(재위 1649∼1659) 때 다시 세웠다고 전한다. 1904년에 보수하고 1987년에 동재, 서재를 복원하였다. 건물은 출입문인 외삼문, 공부하는 곳인 명륜당과 동·서재, 사당인 대성전과 동·서무 등의 건물이 있으며, 앞에 명륜당이 있고 뒤에 대성전이 있는 전형적인 전학후묘의 배치를 이루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받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