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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空空)의 시선

인상 깊은곳

( 대구 경북대 ) 장윤덕 의사 순국기념비

空空(공공) 2019. 11. 9. 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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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정남 공원을 가려고 찾은 경북대..

문으로 들어가 오른편에 보니 조형물이 있다. 일단 여정남 공원을 찾아 보고 나중에 다시 들렀다


장윤덕 의사의 순국기념비다..잘 모르는 분이다.

관련 기록을 찾아 보았다.

항일구국항쟁에 앞장선 경북의 의병장이시다

1965년에 경북대학교 교내에 돌 기념비를 세웠다


장윤덕(張胤德, 1872.7.6 ~ 1907.9.16)은 본관은 단양자는 원숙(元淑), 호는 성암(惺菴)이며아버지 장재안(張載安)

과 어머니 평해황씨 사이에서 1872(고종 9) 7월 6일 태어났다아버지 장재안은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지냈으며그의 아들 장윤덕은 일찍이 한학(漢學)을 배우고 보문사에 들어가 공부했으며, 20살에 예천군 

수서기(首書記)를 지냈다.

 

1905 12, 을사늑약으로 국권이 상실될 위기에 이르자, 그는 수서기직을 그만두고, 국민들에게 항일 

구국 정신 고취와 친일 반역 행위를 규탄하는 민중들의 각성을 촉구하였다. 1907 4월 분연히 일어나 일  제의 침략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비롯한 을사오적(乙巳五賊)을 처단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갔으나 배신자의 밀고로 실패, 고향으로 내려오게 된다. 그리곤 의병대장 이강년(李康秊)이 영춘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장윤덕도 7월 격문을 각지에 발송하여 300여명의 의병을 규합, 편성하여 이강년 의병과 합세하여 의병장으로 활약한다. 주로 풍기(豊基), 봉화(奉化),문경(聞慶), 용궁(龍宮), 예천(醴泉)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1907 7 9일에는 일본경찰대와 교전하여 일본인 보조원(補助員) 3명과 한인 순검 2명을 

사살하였 다. 그해 8 27일 의병 3백여 명을 인솔하고 풍기 일경분파소를 습격하여 1명을 사살하고 31일에는 봉화분파소를 습격하여 건물을 불태웠다. 1907 9 3일 문경읍을 공격하여 일본인 2명을 사살하고 일본인의 가옥을 불태웠으며, 10일에는 이강년(李康秊), 민긍호(閔肯鎬) 등의 의진과 합세하여 1천여 명의 병사를 이끌고 문경 갈평리(葛坪里)에서 일경 나가타니(永谷) 경시(警視)와 미하라(三原) 소위(少尉)가 인솔한 경찰대 및 수비대와 격전하여 일본군 3명과 한인 순검 2명을 사살하고 적을 격퇴시켰다.

 

1907년 9 12, 예천읍 공격에 이어 3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대구 수비대를 격파하고자 

상주읍(尙州邑)을 공격하여 일본인 자위단(自衛團)과 교전하던 중, 대구 수비대에서 출동한 다나카(田中) 대위의 1개 중대와 격전을 벌였으나 패하면서 장윤덕 의병장은 총상을 입고 체포되었다.

 

장윤덕 선생은 내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의거하여 강도 너희 놈들을 몰아내지 못하고 붙잡혔으니 

오직 죽음을 바랄 뿐이며, 너희 놈들과는 아무 말도 하기 싫다.”며 혹독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굴하지 않고 스스로 혀를 끊고 함구로 저항하였다. 결국 그의 나이 35세 되던 해인 1907 9 16일 상주군 함창면(咸昌面) 구향리(舊鄕里) 뒷산에서 총살 순국하게 된다.

 

그의 묘지는 예천군 보문면 수계리에 위치한 보문사(普門寺) 근처에 있으며, 묘비는 장윤덕 의사 기

념사업회에서 1967 9 16일 장윤덕 의병장 서거 60주년을 맞이하여 세웠다  

                                                                  ( 예천 박물관 사이트에서 인용 )


나가는길 시원히 내뿜는 분수를 담아 보았다

배신자들에 의한 밀고로 뜻을 이루지 못한것 분통이 터지는일이 아닐수 없다.

기억해야할 이름이다  ..장윤덕 의사


☞ 6월 30일 혼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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