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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空空)의 시선

시사

두문불출 ( 杜門不出 )

空空(공공) 2020. 3. 13. 0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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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천 오회당 )


코로나19땜에 두문불출한지가 3주가 넘어 간다

두문불출이란 말을 사용할일이 없었는데 요즘은 자주 사용하게 된다


두문불출  ( 杜門不出 ) 을 네이버 국어 사전에서 찾아 보면

 1 .에만 있고 바깥출입을 아니.

 2 .에서 은거하면서 관직에 나가지 아니하거나 사회의 을 하지 아니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


로 풀이 하고 있다.


요즘 자의반 타의반 바깥출입을 삼가고 있으니 내게는 1번이 적절한 해석이다


두문불출은 원래 사마천의 <사기> 상군열전에 나오는 고사성어이다

염파인상여열전(廉頗藺相如列傳), 사마상여열전(司馬相如列傳) 등에서 이 말이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그 내용을 옮겨 보면


상앙이 숨어사는 선비 조양을 찾아 교제를 청하자 조양이 거절하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불초하므로 그대의 뜻을 따를 수 없습니다. 그대가 변법을 강하게 시행하여 많은 사람들의 원한을 사고 있으며 도리에 어긋나고 백성을 교도하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중략- 이대로 가다가는 상군이 하는 일로 인해 천수(天壽)를 누릴 수 없습니다. 태자가 법을 지키지 않았다하여 대신 벌을 받아 코를 베인 공자 건(虔)은 부끄러워 문을 닫고 밖에 나오지 않기를 8년이 되었습니다. -중략- 왕이 죽으면 태자가 왕이 될 것이고 그 왕이 당신을 그대를 잡는 것은 한쪽 발을 들고 기다리는 것만큼이나 빠른 시간일 것입니다.

조나라의 변방을 지키던 이목(李牧)장군의 일화에도 나온다.

흉노가 쳐들어오면 이목 장군은 성안으로 물러나 싸우지 않았다. 흉노가 겁쟁이라 놀리고 병사들도 비겁하다고 여겼다. 왕이 화가 나 이목을 불러 들이고 다른 장군을 보냈다. 그러나 이로부터 흉노가 오면 나가 싸움을 벌였는데 늘 패하였다. 일년 남짓한 동안에 싸울 때마다 잃는 것이 많았고 변방의 백성들이 농사를 지을 수도 양을 기를 수도 없었다. 왕이 할 수 없이 이목을 다시 불렀으나 병을 핑계 대며 완강히 문을 닫고 나오지 않았다. 왕이 강제로 나오게 하므로 이목을 한 조건을 걸었다.

“저는 제가 했던 앞서의 정책을 바꾸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명에 따르겠습니다.”

사마상여와 탁문군(卓文君)이 눈이 맞아 혼인을 하려하자, 탁문군의 아버지 탁왕손은 사마가 부족한 자라며 강하게 반대하였다. 그러나 결국 둘이 타지로 도망하여 선술집을 열고 술장사를 하였다. 탁문군이 큰 화로에 술을 데워 술을 팔고, 상여는 머슴들과 허드렛일을 하며 술잔을 닦았다. 이 소문을 들은 탁왕손이 부끄러워 문을 닫아걸고 나가지 않았다. 

                                                           ( 정문섭의 고사성어에서 부분 인용 )



또한 두문불출 성어는 두문동 72현 땜에 더욱 모르는 사람이 없어졌다

두문동 72현은 고려 충신 72인이 이성계의 명령을 거부한 채 두문동에 들어가 조선의 세상과 인연을 끊은 

일을 말한다

두문동에 관한 기록은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인 성사제의 후손인 성석주(成碩周, 1649~1695)가 그의 조상에

관한 일을 기록한 《두문동실기(杜門洞實記)》가 가문 내에 전해지다 순조 1809년 간행되었고, 고종 때 

사헌부 장령 성대진(成大璡)이 두문동실기를 증보한 《두문동실기(병)속록(杜門洞實記(幷)續錄)》이 남아서 

전해지고 있다. 

당시 많은 선비들이 은거함에 따라 두문동이라는 곳이 나라 안 여러 곳에 남아 있었다. 

이 후 집밖에 나가지 않는 것을 일컬어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고 일컫게 되었다  ( 위키백과)



활짝 문 열고 밖에서 봄이 오는걸 맞이 하고 싶다.

사람들과 어울려 봄꽃을 구경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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