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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空空)의 시선

시사

운명의 날 박선호 의전과장, 수행비서 박흥주 대령

空空(공공) 2020. 3. 9. 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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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포스팅은 당사자들을 평가하는 글이 아닙니다  여러 사실적인 기록을 모아 정리한 글입니다)


영화 "남산의 부장들'로 인해 1979년 10월 26일이 다시 세간의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가 코로나라는 

복병을 맞아 다시 수면밑으로 내려가 버렸다


이 영화에서는 비중있게 다뤄지지는 않았지만 당시 김재규의 수하로써 상관의 명령에 복종한 두 사람이 

있었다

한 사람은 김재규가 차지철에게 총을 쏜후 격발이 안 되자 밖으로 나와 리볼버 권총을 김재규에게 낚아 채인

(영화에도 잠깐 그 모습이 나온다 ) 박선호 의전과장 ( 예비역 대령 )이고 

또 한사람은 김재규가 거사후 정승화 육참총장과 차를 타고 가며 어디로 가야 하냐고 할때 "육본이 

좋겠습니다" 라고 대답했던 수행비서 박흥주 대령이다    ( 4회 공판 12월 11일 녹취록 )

  "그때 그 사람들" 영화에서는 한석규가 박선호 과장역을 김응수가 박흥수 대령역을 했

 

현역군인인 박흥주 대령은 1980년 3월 6일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며 총살형을 당했고 박선호 의전과장은

1980년 5월 24일 김재규가 교수형을 당한 한 시간뒤 같은 장소에서 사형이 집행 되었다.


역사에 ~라면이라는 가정은 없지만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에는 아까운 두 사람이었다

        ( 영화 그때 그사람들 박선호역에 한석규 ,박흥주 대령역에 김응수 김재규역에 백윤식 )


박선호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는 중학 시절 김재규의 제자로 사형 전"다시 그런 상황이 와도 부장님 지시에 따르겠다"라고 

  밝혀 상사에 대한 충성심이 화제가 됐다.

  그는 예비역 해병대 대령 출신으로 해병대학에서 수석 졸업할 정도로 모범생이었다. 

  해병 간부후보 동기생 중 진급이 가장 빨랐던 만큼 성실하고 충직했다.

 대통령의 비밀 연회장에서 술과 여자 조달을 맡아 그는 ‘채홍사’로 불렸다. 

 법정 진술에서 그는 매우 고민했으나 조직과 상관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그 일을 계속했다고 토로했다. 


 그는 또한 법정에서 김재규에 대해 한마디도 원망의 말을 하지 않았다

 끝까지 상관으로서 존경하고 신뢰하는 태도를 견지하고 대통령의 사생활에 문제가 있었다는 증언을 남겼다

                                                                       ( 운명의 술 시바스 김재홍 저 P 274 에서 )


 박선호는 1934년 경북 청도읍에서 출생해 대구 대륜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해병간부후보 16기생으로 

 해병 소위로 임관된 이래 해병 여단 3대대장을 등을 지내고, 1973년 10월 해병 대령으로 예편했다

 그 후 1978년 8월부터 중앙정보부 비서실 의전과장으로 근무해왔다

 중앙정보부 의전과장이라는 자리는 주로 대통령의 행사 지원이다.


 그는 10월 26일의 행적에 대해 재판정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을 했다.

 "26일 오후 4시 25분경에 청와대 경호처장으로부터 오늘은 대행사가 있다. 장소는 나동이다고 연락이 왔다"

 "오늘 경호원이 7명이니 다음 기회에 하는것이 어떻겠습니까 라고 경호원 4명을 7명으로 거짓 보고를 했다"

 "7시 40분경 경호처장.부처장을 향해 총을 쏘았다"

 " 차량 출입을 통제시키고 그 다움날 06시경 처갓집에 가서 가족을 만났다가 사무실로 돌아와서 

  체포되었다"       ( 운명의 술 시바스 김재홍 저 P280~P295에서 발췌 )

 


수행비서 박흥주 대령

 박흥주씨는 육사 18기 선두주자로서 군내에서 신망을 받던 인물이었기 때문에 주변에서는 그의 운명을 

 안타깝게 여기는 사람이 많았다

 1939년 평안남도 평원군에서 출생했으며. 8.15 광복 전인 두 살 때 부모가 충남 금산으로 월남했다

 서울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고 육군사관학교 18기로 입교했다

 사관학교를 졸업한 뒤강원도에 있는 6사단 77포병대대에 근무하다 중위로 진급하면서 6사단장 

 김재규의 전속부관으로 근무하게 됐다.

 그의 상관인 김재규는 업무적으로도 깔끔했고 인간적으로도 아주 따뜻하게 대해 주었다

 그때부터 김재규를 존경하게 되었다

 1969년 3월 김재규가 보안사령관으로 있을 때 506보안부대 수경사반장을 지내는 등 그 후에도 김재규와 

 깊은 인연을 맺었다.

 육군본부에서 팀스피리트 육군 담당 장교로 복무하던 박흥주는 1978 4 1일에 국방부의 명령으로 중앙


 정보부장 수행비서관으로 임명됐다

 

 그는 역시 12월11일 4회 공판에서 아래 진술을 하였다

 

 "10월 26일 남산분청에서 4시 10분경 김재규 부장을 모시고 궁정동에 4시반에 도착했다"

 "18시 30분경 육분 참모총장과 중정 제2차장보를 집무실에서 맞았다

 "19시 40분경 만찬석상의 총소리를 듣고 주방을 향해 권총 5발을 쏘았다'


 '"그 이후 차를 타고 ( 정승화 육참총장,김정섭 차장보,김재규,) 3.1 고가도로에서 남산으로 올라가는 도로

   상에서 박비서관 어디로 가지?  부? 육본?  할때 참모총장이 육본으로 가지 라고 말해 육본이 좋겠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 운명의 술 시바스 김재홍 저 P296~P305 발췌 )

그후 김재규는 모든 지시는 내가 내렸고, 부하들은 당시 상황이 그들이 정상적인 판단을 내릴 조건이

 

아닌 직속상관 자신의 일방적인 명령이었다. 


나는 어떤 처벌도 상관없지만. 단순히 상관의 명령을 집행한 박흥주 대령. 박선호 의전과장 등 부하들은 


선처를 바란다.“ 는 간곡한 호소를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두 사람 다 사형을 당했지만 앞으로 역사의 평가는 달라질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