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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空空)의 시선

2021/11/26 2

( 백제 유적 탐방 ) 낙화암 ( 백화정 ) ,고란사

승자에 의해 쓰여 잘못 알려져 있는 것 중의 하나 백제가 멸망할 때 의자왕의 3천 궁녀가 몸을 던졌다고 전해 내려져 오는 낙화암을 찾았다 수십 명이 될지언정 3천은 분명 아닐 것이다 백제보다 큰 나라였던 조선도 궁녀가 최대였을 때 천명을 넘지 않았었다 ▶궁녀의 수 : 왕실 구성원이 늘면 궁녀도 늘었고, 왕실 구성원이 줄면 궁녀도 감축되었다. 연산군 대에는 1000명이 넘었다고도 하지만 이것은 과장된 듯하다. 인조 대에는 230명 정도, 영조 대에는 600명 정도였고, 18세기의 성호 이익은 당시 궁녀가 684명이라고 하였다. 조선 말 갑오개혁 때의 궁궐제도 개혁안에 따르면 ‘상궁 이하는 필요한 때에 따라 늘리기도 하고 줄이기도 한다. 대전 시녀는 100명, 대비전 시녀는 100명, 중궁전 시녀는 100명..

( 옥천 여행 ) 옥천 향교,옥주 사마소

옥천 구읍은 볼 만한 곳들이 모여 있어 충분히 걸으면서 볼 수가 있다 옥천 향교는 지나치기가 쉬운데 여느 향교와 다른 점이 있어 보고 가면 좋다 ▶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옥천향교 (沃川鄕校) 조선 태조 7년(1398)에 처음 지은 후 임진왜란(1592)으로 불타 없어진 것을 다시 지었으며, 1961년에 황폐한 향교를 복원하였다. 1966년과 1974년에 보수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금 남아있는 건물은 대성전(충청북도문화재자료 제214호)과 명륜당·동재·서재·내삼문·외삼문·고직사 등이다. 건축형태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태이다. 명륜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이다. 옥천 향교는 입구가 명륜당이어 특이하다 입구가 명륜당인 향교는 처음 본다 내삼문도 독특한 모습이다 서재, 동재는 공사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