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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空空)의 시선

영화/한국영화

장사리 잊혀진 영웅들-기억해야할 전쟁,장소.그리고 772명 학도병들

空空(공공) 2019. 10. 8. 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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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사해수욕장의 문산호 기념관


"장사리 -잊혀진 영웅" 영화가 개봉한다 해서 이 영화는 어떻게든 보고 넘어가려 했었다

주말에 다른 일정이 있어 못 보고 지나가나했는데 10월 3일 근무였지만 저녁 시간에 다행히 다녀 올수 있었다.


난 여름 휴가때면 경북 영덕의 장사해수욕장에 몇번 다녀 온적이 있다

장사해수욕장에 가면 2013년부터 공사를 시작해 예산 문제로 개관을 못하고 있는 문산호 조형물을 보고 참 안타깝게

생각을 하곤 했었다

그러나 다행히 공사 시작 6년만인 올년말에는 임시 개관을 하겠다고 하니 기대를 하고 기다려 볼일이라 생각한다.


장사 상륙작전 관련해서 예전 2번이나 글을 올렸었다.

인천 상륙작전에 가려 알려지지 않은 작전..영화로나마 알려졌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었었다

2015/08/13 - [인상 깊은곳] - 장사 상륙작전

2016/08/09 - [영화/한국영화] - 영화 인천상륙작전 그리고 그에 가리워진 장사 상륙작전

2016/09/15 - [생각] - 장사 상륙 작전..오늘 9월15일 기억하다


그때 월간지의 기사를 인용했었는데 그 내용이 영화에 그대로 담겨 있다


2016년 7월 11일 "최초 공개 6.25 전쟁 인천 상륙작전 성공 투입된 LST문산호 선장,선원 명단"이라는 기사에 

그날의 상황이 생존자의 증언을 통하여 비교적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 전략)

 

 맥아더 장군은 인천상륙작전의 성패가 기만전술에 있다고 봤다. 어디가 목표인지를 숨기려는 유엔군과 알아내려는 인민군의 정보전이 치열했다. 맥아더는 미(美) 5해병 연대원들에게 ‘군산(群山)’이란 이름을 흘리면서 인천에서 작전을 펼치기 하루 전 동해안 장사(章沙)에서 양동(陽動) 작전을 펴기로 했다. 작전명 174. 장사동상륙작전은 이렇게 시작됐다. 
  
  작전에는 여수철수작전을 성공시킨 문산호가 투입됐다. 제1유격대대 4개 중대(772명)를 태운 문산호는 1950년 9월 15일 새벽 4시 반, 장사동 해안에 도착했다. 부산을 떠난 지 이틀만이었다. 
  
  상륙부대는 이름만 제1유격대대였을 뿐 이들은 경남 밀양에서 불과 보름 정도 훈련을 받은 앳된 10대 학도병이었다. 실탄을 채 10발도 쏴보지 못한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군에서 보급받은 것이라곤 소련제 장총과 배낭, 인민군 군복, 물 약간, 건빵 한 봉지, 미숫가루 세 봉지가 전부였다. 원래 이 작전은 위험한 임무 특성상 미 8군이 수행해야 했지만, 미군은 “실패할 위험이 크다”는 이유로 우리 군에 떠넘겼다.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기 어려웠던 육군은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학도병들에게 작전을 배정했다. 부대장 이명흠 대위 이름을 따 ‘명(明)부대’로도 불렸던 이들을 태운 문산호는 장사동 근해에 함미닻을 투묘(投錨)하고 해안으로 접근해 들어갔다. 이명흠 대위가 손가락으로 접안(接岸) 장소를 가리켰다. 황 선장은 너무 위험하다고 했다. 이 대위는 작전 지점이라며 접안을 지시했다. 황 선장은 위험을 무릅쓰고 그곳으로 뱃머리를 돌렸다. 날씨가 도와주지 않았다. 때맞춰 내습(來襲)한 태풍 ‘케지아’ 때문에 암초에 걸린 것이다. 북한군의 집중포화가 시작됐다. 
  
  “바다에 빠져 고기밥이 되는 것보다 육지에 올라가 까마귀밥이 되는 게 낫다.” 이 대위의 상륙(上陸) 명령이 떨어졌다. 새벽 5시 반이었다. 해변까지는 50여m. 파도 높이는 4~5m에 달했다. 배는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배에서 나오던 대원들은 해발 200m 고지에 포진한 북한군 2군단 예하 101보안부대의 기관총 세례에 차례로 쓰러져갔다. 
  
  류병추 장사상륙참전유격동지회장은 “총알이 비 오듯 쏟아졌고, 죽고 사는 기로에 선 게 실감나지 않을 정도로 정신없었다”고 회상했다. 많은 대원이 거센 파도에 휩쓸려 바닷속으로 빨려들어 갔다. 대부분의 탄약도 바다에 유실됐다.  
  
  
 장시간의 사투(死鬪) 끝에 ‘명부대’는 상륙에 성공했다. 황 선장과 선원들도 함께였다. 문산호에 파견됐던 미 해군 쿠퍼 상사는 해군본부에 문산호와 명부대의 상황을 알렸다. 해군본부는 인왕(LT-1)호를 현지에 급파했다. 명부대의 상륙 다음날인 1950년 9월 16일 오전 7시 현지에 도착한 인왕호는 문산호 구출에 착수했지만, 실패하고 부산으로 철수했다. 이 사이 유격대원들은 해안선을 따라 이동하며 적진지를 파괴하고, 도로와 교량을 폭파했다. 이 과정에서 ‘유격전의 귀재’로 불렸던 군사고문 전성호 대령, 황 선장과 선원 전원이 전사했다. 
  
  살아남은 이들은 장사동상륙작전이 인천상륙작전의 교란작전인지도 모른 채 북한군 정예 병력과 악착같이 싸웠다. 명부대의 기세에 인민군은 포항에서 대규모 병력을 빼 장사 해안으로 출동시켰다. 이 와중에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 전쟁의 주도권이 아군으로 넘어왔다. 

                                                                   ( 후략)

많은 제작비를 투입했고 스토리 부분,액션부분을 나누어 연출하여 나름대로 볼만은 했는데 아무래도 상영 시기를 

잘못 택한게 아닌가 싶다

장사 상륙자전일인 9월 중순에 개봉했더라면  지금 박스오피스의 2배는 무난했지 않나 싶다.

특히 생생한 전쟁신은 일품이었는데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705만명의 박스오피스를 기록한 영화 "인천상륙작전"보다 훨씬 좋게 생각되었다.


6.25 관련 전쟁 영화만 나오면 이념.국뽕등의 논란이 있지만 영화를 그렇게 이분법적으로 평가를 해서는 안될일이다

왜 6.25의 전쟁이 "동족 상잔의 비극"인지 이 영화에서는 조금 말해 주려 한것 같다.

하여간 전쟁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될일이다.형제.친지들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일이 발생하니 말이다


이 영화에는 미국 유명배우 메간 폭스가 종군 기자역으로 나와 화제가 되었었다.

나는 메간 폭스보다 오히려 CSI 라스베가스 시리즈에 나오는 "조지 이스"가 더 반가웠다 

(한줄줄거리)

인천상륙작전 하루 전, 이명준 대위(김명민)가 이끄는 유격대와 학도병들을 태운 문산호가 장사리로 향한다. 평균 나이 

17살, 훈련 기간 2주 남짓, 전투 경험 역시 전무한 772명의 학도병들은 북한군을 교란시킬 목적으로 장사상륙작전에 

투입되었다. 낡은 무기와 부족한 탄알, 최소한의 식량만을 보급받은 그들은 장사 해변에 상륙해 적의 보급로를 

차단해야 한다. 태풍으로 문산호가 좌초되는 등 이어지는 여러 난관 속에서도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작전을 수행하려 

노력한다. 


조국은 여러분을 기억할것이다

미국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중 하나는 언론의 자유..-요즘 우리나라는 언론 자유가 도를 넘은것 같다.


★★★☆ 기억해야할,잊어서는 안될 장사상륙작전..그리고 학도의용군 772명


☞ 10월 3일 혼자서 CG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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