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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空空)의 시선

인상 깊은곳/고택,고건축물

금호강의 누정-압로정 ( 狎鷺亭 )

空空(공공) 2020. 12. 4.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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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0월과 11월 구수산도서관의 "길위의 인문학"강연에서 "금호강의 누정"에대해 경북대 특별연구위원이신

구본욱 선생의 강연을 들은적 있었다.

그때 "압로정"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었고 아직도 금호강변에 "압로정"이 있다 하길래 언제 시간나면 한번

찾아 볼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지난번 금호강을 걸을때 한번 찾아 보았다


예전에도 금호강변을 걸으며 본것 같았는데 그때는 그냥 지나쳤었다

확실히 관심을 가져야만 보이는 모양이다

이제 알고 나니 그냥 지나 치지는 못할것 같다


지금도 금호강 주변에는 옛 선비들의 많은 정자가 남아 있다 ,

요즘으로 치면 권세 있는 집안의 별장 같은 것일수도 있겠다

그중에서도 대구 제1의 정자로 평가되는곳이 "압로정"이다


압로정이 있는 검단동(檢丹洞)은 조선중기에 순흥안씨(順興安氏)와 우계이씨(羽溪李氏)가 이 마을을 개척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대구부 동중면(東中面)에 속했으며, 금호강과 팔공산을 조망하는 곳으로 압로정을 비롯한 

많은 정자가 있었으며, 대구에서 팔공산으로 가는 나루터가 있었다.

삼한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보이는 검단토성(檢丹土城)이 있으며, 지금은 북쪽 구릉위의 성벽 일부만 남아 있다.



압로 (狎鷺 )는 물새와 친하다는 의미이다


조선 명종때(1561년) 송담 채응린이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금호강과 불로천이 합류하는 지점의 검단동 왕옥산 

구릉지에 세운 정자이다.

이 정자는 仁川人(인천인) 貞義公(정의공)의 7世孫(세손)인 進士(진사) 松潭(송담) 蔡應麟(채응린)띠 

561년(明宗, 명종 16) 32세때 후진 양성을 위해 講學之所(강학지소)로 두 亭(정)뜰 건축하여 많은 儒生(유생)들을 

배출하였다. 

한때 本府(본부) 城主(성주) 道伯(도백)과 鄕中士林(향중사림)들이 亭韻時會(정운시회)를 大設(대설)하였으며 

주위의 풍광이 아름다워 八景吟(팔경음)을作時(작시)하여 후손에 傳(전)하고 있다.


부근에 松潭(송담) 蔡先生(채선생) 遺墟碑(유허비)가 있다


압로정은 소유정과 더불어 임진왜란 당시 왜적이 퇴각할때 불을 질러 소실되었다가 1609년에  복원되었다

그뒤 1673년 인근 마을의 불량배들이 불을 질러 다시 소실되고 이후 빈터만 남아 있다가1793년 송담의 8대손 

채필훈 형제가 왕옥산으로 이사와 압로정을 중건하게 된다

이후 소유정은 중건되지 못하였고 압로정은 여러차례 중수를 거치며 지금까지 금호강변에 자리잡고 있다

                                                  ( 이상 구본욱 선생 강의 자료 발췌 )


언덕위에 보이는곳이 압로정이다

예전에는 그냥 지나갔었다

듣기에는 거주하시는 분이 없다 했는데 사나운 개가 지키고 있었다

그래서 멀찌감치..

유허비로 생각이 된다

안으로 들어가는것을 포기하고 내려갔다

그런데 뒤로 또 올라가는 길이 있었다

채선생의 묘소인듯

묘소에서 본 압로정 뒷쪽 모습

사람이 사는지 관리인이 게시는지는 정확하게 모르겠다

뒤로 들어 가는 문은 없었다

압로정에서 본 금호강


역시 뭐든 관심을 가지면  보인다


☞ 3월 16일 아내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