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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空空)의 시선

인상 깊은곳/고택,고건축물

모명재 그리고 두사충의 묘소

空空(공공) 2020. 9. 4. 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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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모명재를 찾은게 이번이 3번째다

첫번째는 나혼자 갔었고 그 다음은 아내와 ,이번은 아내,처형과..

갈때마다 인원이 한명씩 늘어난다

이번은 모명재 관람이 목적이 아니었고 모명재 길을 걷기 위함이었지만 처음 방문하신 분이 있어 들르게

되었다

예전에는 없었던 모명재 관광 안내소도 생기고 해설자분도 계셨다.

마침 해설자 분이 나와 계셔 해설을 부탁드렸고 흔쾌히 해설을 해 주셨다


▶ 모명재

대구 수성구 달구벌대로525길 14-21(만촌동)에 세워져있는 모명재는 임진왜란당시 명나라 장수로서 

우리나라에 원군으로 왔던 두사충이 우리나라에 귀화한 후에 그 후손들이 1912년에 세운 것으로 고국인 

명나라를 사모한다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며 대문에 달려있는 만동문이란 명판역시 

백천유수필지동[白川流水必之東]이라는 말에서 따온 것으로 이도한 근본을 잊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현재의 모명재는 경산객사가 헐리자 그 재목을 사와 두사충의 묘소앞에 지은것인데 1966년 건물을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모명재는 네모반듯한 대지위에 남향으로 배치되어있으며 대문을 통해 들어가면 

모명재가 앞쪽에 있다. 

정면4칸 측면2칸규모의 겹처마팔작 기와집으로 지어졌으며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들이고 

앞쪽에는 반칸규모의 퇴칸을 두고 있다.

조선에 귀화한후 계산동일대에 정착한 두사충은 명나라[중국]에 두고온 부인과 형제들이 생각이나 

최정산[지금의 대덕산]밑으로 집을 옮기고 명나라를 생각한다는 뜻으로 마을 이름을 대명동이라 불렀다고 

전한다.


▶ 명정각

두사충의 재실이 있는 서쪽 100m 지점에 붉은 벽돌담에 둘러싸인 아담한 효자각이 명정각이다.

이 효자각은 두사충의 7대손인 두한필(杜漢弼)의 효행을 널리 알리기 위해 조정에서 정려(旌閭)을 내린 것이다.

두한필의 호는 소남(小楠)으로 1823년(순조23년)에 태어난 1893년(고종30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어릴 때부터 

부모에 대한 효행이 지극하였다. 나중에 조정에까지 소문이 퍼져 그의 사후에 정려(旌閭)가 내려오고 

종3품 관직인 통훈대부 규장각직각(通訓大夫 奎章閣直閣)을 증직하였다. 

현재의 명정각은 1912년 두사충의 재실인 모명재를 지을 때 함께 건립한 것이다. 이후 1966년 후손들이

모명재와 함께 보수 하였다.


명정각

만동문

모명재

모명재 관광 안내소와 해설사 선생님

신도비의 비문은 

이순신 장군의 7대손인 이인수가 지었는데,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과 두사충의 가까운 사이가 후손들에게까지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두사충은 중국 두릉사람으로 임난이 일어나자 명나라 제독 이여송과 우리나라를 도우기 위해 나왔다. 

그가 맡은 일은 수륙지획주사라는, 지세를 살펴 진지를 펴기 적합한 장소를 잡는 임무였다. 

따라서 그는 이여송의 일급참모로서 항상 군진을 펴는데 조언해야 했고 조선과의 합동작전을 할 때 

조선군과도 전략 전술상의 긴밀한 협의를 했다. 이러한 인연으로 그는 당시 우리나라 수군을 통괄하던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도 아주 친했다.


임난이 평정되자 두사충은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그의 매부인 진린 도독과 함께 

우리나라로 나왔다. 이때 두사충은 충무공과 다시 만나게 되었다. 

숭정은 명나라 연호이다

북으로 가면 고락을 같이 하고/동으로 오면 죽고 사는 것을 함께 하네 성남쪽 타향의 밝은 달아래/

오늘 한 잔 술로써 정을 나누세

이순신의 시

상세하게 설명해 주시는 해설사 선생님

이순신 장군과 술잔을 나누는 모습

정유재란도 평정되자 두사충은 압록강까지 매부 진린을 배웅한 후 자기는 조선에 귀화했다. 

두사충이 귀화하자 조정은 두사충에게 대구시내 중앙공원 일대를 주고 거기서 살도록 했다. 

두사충이 받은 땅에 경상감영이 옮겨오게 되자 두사충은 그 땅을 내어놓고 계산동으로 옮겼다. 

이때부터 계산동 일대는 두씨들의 세거지가 되었는데 두씨들은 계산동으로 옮기자마자 주위에 많은 

뽕나무를 심었고 그 때문에 이 일대를 뽕나무 골목이라 부르게 됐다. 

러나 사람이 늙으면 누구나 고향이 그리운 법, 수만리 떨어진 타국에서 편안한 생활을 하는 두사충이었지만 

고국에 두고온 부인과 형제들이 생각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두사충은 최정산(현재의 대덕산)밑으로

 집을 옮겨 고국인 명나라를 생각하는 뜻에서 동네 이름을 대명동이라 붙이고 단을 쌓아 매일 초하루가 되면 

고국의 천자쪽을 향해 배례를 올렸다고 한다. 이후 나이가 더 많아지자 어느 날 자기가 젊었을 때 

대구 근교를 샅샅이 뒤져잡아 둔 묘터를 아들에게 알려주기 위해 가마를 타고 묘터가 있는 고산(孤山)으로 향했다. 

그러나 워낙 쇠약한 몸이라 도저히 고산까지 가지 못하고 담티재에서 되돌아오게 되었다. 

돌아오는 길에 두사충은 아들에게 오른쪽의 형제봉을 가리키면서 저 산아래 계좌정향으로 묘를 쓰면 

자손이 번창할 것이라 예언했다. 따라서 그의 사후 자손들은 두사충이 잡아둔 명당까지 가지 못하고 

묘소를 형제봉 기슭에 쓰게 되었고 두사충이 잡아둔 묘터에는 나중에 고산서원이 들어섰다.

      ( 이상 모명재 누리집에서 인용 )

두사충의 묘소


두번씩이나 조선을 도와준 책략가 두사충

그의 고뇌가 이해가 된다..

중국 관광객이 많이 찾아 온다는데 중국은 그를 어떻게 평가할까?


☞ 7월 4일 아내,처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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