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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空空)의 시선

인상 깊은곳/서원_향교

( 경주 여행 ) 경주 향교, 계림

空空(공공) 2017. 9. 29. 0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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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를 십여회 이상 왔었지만

경주 향교를 본건 이번이 처음이다

예전에는 관심도 좀 없었었고

경주향교가 위치하고 있는곳이

좀 막다른것도 그 이유중의 하나다

 

경주 향교를 중심으로 교동마을,계림

석빙고,월성 유적,대릉원,첨성대까지

볼수 있어 이곳에 차를 주차를 했다

 

경주향교는 다른곳과 달리 개방이 되어 있었다

경주향교 대성전은 2011년에 보물로 ( 제1727호 )로 지정되었다

( 경주 향교 )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191호 
이 자리는 원래 신라 신문왕 2년(682)에 처음 세워진 국학이 있던 곳이다. 경주 향교가 처음 지어진 시기는 잘 알 수 없으나, 조선 성종 23년(1492)에 서울의 성균관을 본 떠 고쳐지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불탄 뒤 선조 33년(1600)에 대성전과 전사청을 다시 지었다. 이어서 선조 37년(1604)에 동무와 서무를 짓고, 광해군 6년(1614)에 명륜당과 동재·서재를 더 지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건물은 전형적인 전묘후학(前廟後學)의 배치구조를 보이고 있다.

대성전과 동무·서무는 공자를 비롯한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을 받드는 곳이다. 강당인 명륜당과 동재·서재는 학생들이 공부하고 기거하는 시설이다. 대성전은 앞이 3칸이고 옆이 3칸인 맞배지붕으로 위엄이 있다. 명륜당은 앞면 5칸에 옆면 3칸인 겹처마 맞배집이다.

우물터인 모양인데 별다른 설명이 없었다

이곳은 독특하게도 사대가 있고 과녁이 있었다

( 명륜당 )

 경주향교에서 교생들이 학습하고 생활하는 곳, 명륜당과 동서 재를 포함하는 강학공간은 대성전의 제향공간보다 낮게 배치되어 있다. 임진왜란 이후 대성전이 중건되고 광해군 6년(1614년)에 부윤 이안눌이 명륜당과 동서 재를 중건하였다. 명륜당은 앞면 5칸, 옆면 3칸의 겹처마 맞배집이다. 중앙에 대청 3칸을 두고 좌우로 겹실 1칸을 두었다. 앞면 1칸은 모두 통칸이다. 헌종(憲宗) 7년(1841년)과 고종(高宗) 10년(1873년)에 대성전과 함께 중건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며, 1978년에 다시 중건되었다. 1982년에 동재와 같은 양식으로 서재와 함께 고직실이 중건되고, 1995년 명륜당에 이어 2002년에 동재가 중건되었다. 동서 재 모두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축물로 앞면 반칸에 툇마루를 두고 내부는 모두 통칸으로 삼았다.

동재

서재

대성전

경주향교는 처음 지어진 시기는 잘 알 수 없으나, 조선 성종 23년 (1492)에 경주부윤 최응현<崔應賢>이 중수하였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선조 33년(1600)에 부윤 이시발<李時發>이 대성전과 전사청을 중건하고, 선조 37년 (1604)에 부윤 윤성이 동·서무를, 광해군 6년(1614)에 부윤 이안눌<李安訥>이 명륜당과 동·서재를 중건하였고, 이 때 제독청 전면에 연못과 작은 누대(樓臺)를 꾸몄다 한다. 효종 6년(1655)명륜당 북쪽에 송단(松壇)을 쌓고 현종 10년(1655)송단 동쪽에 존경각(尊經閣)을 신축하고 동,서무를 중수하였다. 이 때 부사(府使)민주면(閔周冕)이 유생과 상의하여 임해전(臨海殿)터에 있던 고 석물들을 가져다 과거에 없었던 계단과 정로(正路)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 향교는 경상북도 내에서 규모가 큰 편에 속하며, 건물 배치는 나주향교<羅州鄕校>와 함께 향교의 표본이다.

경주향교는 계림(桂林)의 서편, 문천(蚊川)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경주향교 부지는 신라때 요석궁이 있던 곳이라 전해오며, 향교는 정남에서 동쪽으로 약 10도 가량 틀어져 앉아 있다.

경주향교는 대설위(大設位)향교이다. 평지에 입지하고 있는 경주향교는 외삼문(外三門), 신삼문(神三門), 대성전, 명륜당이 남북 축선상에 자리잡아 남향하고 있으며, 문묘영역이 강학영역 앞쪽에 위치하는 전형적인 전묘후학(前廟後學)의 배치형식을 따르고 있다.

경주향교 건축물 중에서 대성전은 연혁이 분명하고, 공포와 창호 및 가구에 고식의 기법이 잘 남아 있으며, 대성전 종도리에서 발견된 상량 묵서명을 통하여 대성전의 중건년대와 당시 참여한 장인등의 역사적 사실을 확인할 수 있어 역사적, 학술적, 건축적으로 가치가 크다.

( 존경각)

 명륜당 북쪽, 송단 동쪽에 위치해 있는 정면 2칸, 측면 1칸의 건물이다. 현종(顯宗) 10년(1669년)에 부윤 민주면(閔周冕)이 송단 동쪽에 지었다. 지금의 건물은 1989년에 복원된 것이다.

경주 향교 뒷문으로 나가면 바로 계림이다

( 계림 ) 사적 제 19호
계림은 경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가 태어난 곳이라는 전설을 간직한 숲이다. 원래 신라를 건국할 때부터 있던 숲으로, 시림(始林)이라고 하던 것을 알지가 태어난 뒤로 계림(鷄林)이라 하였다. 

탈해왕 4년(60)에 왕이 금성 서쪽 시림 숲 사이에서 닭 우는 소리가 들리고 온통 환한 빛으로 가득하여, 날이 밝은 후 신하를 보내어 살피도록 하였다. 신하가 시림에 이르러 보니 금으로 된 조그만 궤짝이 나뭇가지에 걸려있고 흰 닭이 그 아래에 울고 있어 돌아와 고하니, 왕이 즉시 시림으로 가서 궤짝을 열어 보았다. 그 속에는 총명하게 생긴 사내아이가 있었고, 왕은 하늘에서 보낸 아이라 하여 태자로 삼았다. 아기라는 뜻의 '알지'라는 이름을 주고 금궤에서 나왔으므로 성을 김씨라 하였다.

왕은 알지를 태자로 삼았으나 후에 알지는 파사에게 왕위를 양보하였다. 그 후 알지의 7대 후손이 왕위에 올랐는데, 그가 미추왕이다. 이후 내물왕부터 신라가 망할 때까지 김알지의 후손이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으며, 계림은 신성한 곳으로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이곳에는 조선 순조 3년(1803)에 세운 김알지 탄생에 대한 비(碑)가 남아있다.

 

 내가 딛는 이 땅이 신라인들이 디디던 땅이다

 한걸음 한걸음 천천히 내딛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