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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空空)의 시선

인상 깊은곳/서원_향교

( 경북 칠곡 ) 곤산서원, 신유장군 유적지

空空(공공) 2017. 10. 6. 0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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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목 남계리 벽화마을을 둘러보고

시간 여유가 좀 있길래 근처

유적지를 찾아 보았더니

신유장군 유적지라고 있었다

 

가는길에 옛 건물이 보이길래 차를

세웠다

지도에는 나와 있지 않은데 "곤산서원"

이라고 되어 있다

 

잠시 차를 세워 개방은 되어 있지 않았지만 밖에서 잠깐 둘러 보았다

( 곤산 서원 )

 1773년(영조 49)에 묘우로 건립된 뒤 1783년(정조 7)에 신우덕(申祐德), 신익황(申益愰)을

봉안하고 서원으로 승격되어 강학을 한 곳이다.

그러나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어 빈터로 남아 있다가 최근 2004년 이 터에 다시 곤산서원이

복원되었다.

경도사(景道祠)와 영모재(永慕齋) 그리고 외삼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경도사에는 곤산서원에

배향된 신우덕(申祐德), 신익황(申益愰) 두 분의 신주를 모시고 영모재에는 진정공 신우덕의 후손

 다수의 신주를 봉안하여 강당보다는 재실의 기능을 하고 있다.

2003~2004년에 평산신씨 문중에서 복원하였다. 사당 앞에 비석 1기가 있다.

다시 신유 장군 유적지로 발길을 아니 차를 돌렸다

( 신유장군 유적지 ) 경상북도 기념물 제38호

 조선 중기의 무신 신유(1619∼1680) 장군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신유는 인조 24년(1646) 무과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함경북도 병마우후로 있을 때 중국 청나라의 부탁으로 효종 9년(1658) 군대를 이끌고 흑룡강 부근에서 러시아 군대의 배 10척과 270여 명의 군사를 무찌르는 큰 공을 세웠다. 이를 나선정벌이라 하며 장군은 이 원정의 내용을 『북정일기』라는 기록으로 후세에 남겼다.

『북정일기』는 우리나라와 러시아간에 최초의 접촉으로 현지 사령관이 쓴 기록이란 점에서 세계사적인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 문화재청 누리집에서 인용)

 

1680년(숙종 6)에 장군이 62세로 생을 마감하자 왕이 제문을 내리고 예관을 보내 제사하게 하였다. 그 후 약목면 남계리 숭무사에 제향하고 경내에 신도비를 세웠는데 판서 이현일이 비문을 짓고, 글씨는 교리 이동적이 전액하고 이재익이 음기를 썼으나 6·25전쟁 때 포격으로 파손되었다. 그 후 고쳐 세운 비석의 글씨는 이상건이 썼다.

묘소는 숭무사 뒷산인 봉명산 중턱에 있으며 매년 음력 정월 15일에 향사(享祀)하고, 3월에는 후손들이 추모제를 올리고 있다. 장군의 유물로는 교지 35장, 논서 6장, 교서 1장, 사제문 1장, 부인교지 1장, 분재기 1통, 간찰 1통이 있다. 사당과 경역은 1979~1981년에 보수·정화하였다.

                                     ( 디지털 칠곡 문화대전에서 인용)

 

가수 신유의 고향도 이곳이다

 

아랫쪽에 관리인도 계시는데 개방이 안 되어 있어 조금 아쉬웠다

주무시는데 깨우기도 뭣했다

 

하천을 따라 있는 각종 공덕비는 아무런 설명과 들어 갈수가 없어 먼 발치에서 보기만 했다

조금 더 정성스런 관리가 필요하겠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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