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을 앞둔 연휴가 시작되는 토요일
오전 2시간의 짜투리 시간이 생겼다
뭐라도 해야 되는데..영화를 보기에는
시간이 부족하고..가지고 있는 지도를
보고 갈만한곳을 찾았다
오고 가고 1시간 보는데 1시간
적당한곳을 찾았다
대구 달성에서 안 가본곳 현풍향교와 그 주변 문화재들 안 찾아 본곳이 눈에 띄어 망설이지 않고
찾아 나섰다
현풍향교를 처음 지은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옛 교동에 다시 지었고 영조(재위 1724∼1776) 때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겨 지었다. 대성전은 영조 26년(1750)경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로는 대성전, 동무·서무, 명륜당, 동재, 서재 등이다. 대성전은 공자를 비롯하여 중국과 우리나라 유학자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지내는 곳이다.앞면 3칸·옆면 3칸 규모로,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으로 꾸몄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있다.
현풍향교 정면 처음엔 문이 잠겨 있는줄 알았다
왼쪽 관리사는 잠겨 있었다
현풍 향교는 군더더기 없는 전형적인 향교 건물과 배치를 가지고 있었다
외삼문을 들어 가면 정면에 명륜당과 동재,서재가 있다
현풍향교를 1759년 현 위치로 옮긴 김광태 현감의 기적비 ( 업적을 기록한 비)
보통 내삼문은 닫힌게 대부분인데 감사하게도 여긴 열려 있었다
어느분의 안경일까?
대성전과 동무,서무
다음 찾아간곳은 현풍 곽씨 십이정려각이다
( 현풍 곽씨 십이정려각 ) 대구시 문화재자료 제29호
현풍 곽씨 집안의 유교 도덕에 기본이 되는 삼강(三綱)을 지킨 28인의 정려비로, 선조 31년(1598)부터 영조 때(재위 1567∼1608)까지 포상된 12명을 한 곳에 모시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자식, 남편과 아내 사이에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인 삼강을 잘 지키면 이를 국가에서 포상하며 기리도록 하였다. 한 마을의 한 성씨(곽씨)에서 12명의 포상자가 나왔다는 것은 흔치 않은 일로서, 정려를 받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임진왜란 때 안음현감 곽준이 황석산성에서 두 아들과 같이 전사하게 되자 며느리와 출가한 딸이 남편을 따라 자결하였기에 선조가 정려했다.
곽재훈의 아들 4형제가 임진왜란 때 병환 중에 있는 아버지를 왜적으로부터 보호하였기에 선조가 정려했다.
곽재기의 부인 광주 이씨는 임진왜란 때 왜병을 만나자 순결을 지키기 위해 물에 빠져 죽었기에 선조가 정려했고, 곽홍원의 부인 밀양 박씨는 강도가 들어와 남편을 해치려 하자 죽음으로써 남편을 보호하였기에 현종이 정려했다.
곽수영의 부인 안동권씨는 남편이 병으로 위독하게 되자 자신이 대신 죽기를 기원했으나, 남편이 죽게 되자 먹지 않고 따라 죽게 되니 현종이 정려했다.
건물은 앞면 12칸·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으로 꾸몄다.
정려각 안에는 2개의 비석과 12개의 현판이 있다. 건물과 현판은 최근 것이나, 12정려각은 그 유례가 흔치 않은 것으로 중요한 유산이라 할 수 있다.
한 집안의 가풍을 대대로 또 인척들이 잇는다는건 참 어려운 일일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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