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군훈련소(논산훈련소) 가기전 견훤왕릉
이라고 고동색 팻말이 보이길래 돌아가는길에 비가
그치고 시간이 남으면 들러 보기로 했다
견훤의 흔적은 대구 팔공산에서도 찾을수 있다
태조 왕건에 의해 견훤의 후벡제는 멸망했지만
견훤은 태조 왕건에게 팔공산에서 치욕의 패배를
안기기도 한바가 있다
8명의 충신이 목숨을 잃어 팔공산이라고까지 하니말이다
팔공산 올라가는길에는 그때의 장수였던 신숭겸의 유적지가 있다
그런 견훤의 묘소가 이곳에 있다하니
돌아가는길 비도 그치고 해서 잠시 둘러 보았다
충청남도 논산시 연무읍 금곡리에 위치한 이 묘는 후백제의 시조 견훤(甄萱:867∼935)의 것이라고 전해온다. 견훤의 원래의 성은 이(李)씨이며, 상주 사람으로 신라 장군 이자개의 아들이라 한다.
신라 진성여왕이 즉위하면서 몇몇 신하들의 횡포로 정치 기강이 문란해졌고, 또 기근이 심하여 백성들의 원망과 봉기가 심해졌다. 이때 견훤이 경주의 서남 주현(州縣)을 공격하니 이르는 곳마다 사람들이 호응하여, 마침내 진성여왕 6년(892)에 무진주(지금의 광주)를 점령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그 뒤 완산주(지금의 전주)에 도읍을 정하고 후백제를 세워 40여년간 다스렸다.
고려 태조 19년(936)에 황산불사(黃酸佛寺)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죽을 때 전주 완산이 그립다고 유언을 하였으므로 완산을 향하여 묻었다고 한다.『삼국사기』에는 걱정이 심해 등창이 나 황산의 절에서 죽었다는 기록이 있으며,『동국여지승람』에는 견훤의 묘는 은진현의 남쪽 12리 떨어진 풍계촌에 있는데 속칭 ‘왕묘’라고 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커다란 봉분 앞에 1970년 견씨 문중에서 세운 비석이 서 있을 뿐 주변에는 아무 시설이 없고 남쪽으로 전주 뒷산이 70리 떨어져 잘 보이고 있다.
계단으로 조금만 올라가면 되는데
헉..숨이 찬다 이런...겨울내 운동 부족
견훤은 원래 통일 신라의 장군이었으나 후백제를 세웠다
진성여왕이 나라를 잘 돌보지 못한 그 시대이다
전망이 좋다
맑은 날은 충분히 전주까지 보일듯 하다
산수유가 막 피어나고 있다
가는길 금곡서원이 있어 들렀는데 문이 잠겨 있었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1636년 병자호란 때 강화도 남루(南樓)에서 스스로 분사(焚死)한 김수남(金秀南)을 추모하기 위하여 지은 서원이다. 1687년(숙종 13)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이 가야곡면(可也谷面) 조정리(釣亭里)에 신축하고 위패를 봉안하였다. 창건과 함께 ‘금곡사(金谷祠)’라는 사액을 받았다.
1690년(숙종 16)에 김수남의 유풍지(流風地)인 현재의 위치로 이축하였으며, 1781년(정조 5) 성삼문(成三問)과 조계명(曺繼明) 양위를 추가로 배향하였다.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어, 그해에 서원터에 단소(壇所)를 설치하고 봄 가을에 향사를 지내오다가 1977년에 사우를 건립, 복원하였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사우, 각 2칸의 동재(東齋)·서재(西齋), H자형의 강당, 외삼문(外三門)·내삼문(內三門), 4칸의 고직사(庫直舍), 3칸의 전사청(典祀廳)이 있고 이 밖에 김수남의 정문(旌門) 및 충노(忠奴) 무작김(無作金)의 불망비(不忘碑) 등이 있다.
목적지 일을 보고 이렇게 한두군데라도 역사의 흔적을 찾아 보는건 예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다
시간이 넉넉치 않음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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