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카오톡 채널 추가 버튼
공공(空空)의 시선

인상 깊은곳/서원_향교

( 통영 여행 ) 이순신 장군의 위패 사당-충렬사 사적 제236호

空空(공공) 2019. 9. 11. 04:00
728x90
반응형


국내에 충렬사라고 아름 붙여진곳이 6~7곳 정도 되는데 그중에 이순신 장군을 기리는곳이 3곳이다 ( 통영,남해,정읍)


이곳 통영 충렬사는 선조39년(1606)에 왕의 명령에 따라 제7대 이운용 통제사가 창건 하였으며, 현종4년(1663)에는 

남해 충렬사와 함께 임금이 내린 충렬사 사액을 받은 사액사당이다.

그 후에는 역대의 수군통제사들이 매년 봄, 가을에 제사를 지내왔다.

경내에는 본전, 정문, 중문, 외삼문, 동서재, 경충재, 숭무당, 강한루, 유물전시관이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경내에는 많은 비석들이 보존되어 있는데 이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숙종7년(1681)에 60대 민섬통제사가 세운 
통제사충무이공충렬묘비이며 충무공 후손통제사 비각 2동에 6기가 있고, 이운용 통제사 비각, 김중기 통제사 비각, 
유형 통제사 비각이 있다.

이곳에는 명나라 신종황제가 내린 8가지의 선물인 명조팔사품(보물440호)과 정조가 충무공전서를 발간하고 1질을 
통영충렬사에 내리면서 직접 지어 내린 제문 등이 유물전시관에 전시되어 있다. ( 국가문화유산포털에서 가져옴 )


1973년 6월11일에 사적 제236호로 지정되었다.

경내 건물에 대한 내용은 충렬사 누리집에서 가져왔다   ☞ 통영 충렬사 http://www.tycr.kr/introduce.php )


주차장에서 조금 걸어 들어가야 한다

홍살문

충렬사의 여섯 개의 문 가운데 첫째 문이다.

2개의 둥근 기둥위에 지붕 없는 붉은 살을 열지어 박아세웠다. 홍전문(紅箭門)이라 쓰고 홍살문이라 읽으며 때로는 

홍문(紅門)이라고도 하는데 정2품 이상의 신위를 모신 사당에만 세울 수 있다.

정문

홍살문 다음 계단을 오르면 나타나는 첫 출입문이다.

삼문구조인데 양편의 협문은 출입구이고 가운데 문은 신문(神門)이라 하여 제삿날에 열어 신을 맞아들인다.

삼문 좌측의 익사(翼舍:날개)는 안내소이고 우측의 익사는 해설사 사무실이다.

어른 1,000원의 입장료가 있다

경건한 마음으로 참배

내삼문

정당의 출입문으로 삼문 중 가장 안쪽의 문이다. 단아하면서도 정교한 건축양식으로 조선중기 삼문조형(三門造形)의 

정화(精華)이다. 솟을삼문으로 신문(神門)의 양쪽 초석을 해태로 조각하고 안팎에 활주(버팀기둥) 8개로 지붕의 무게를 받혔는데 각 활주 아래의 석자는 8각 돌기둥이다.

 통용문인 양쪽 협문(夾門)을 낮게 만든 것은 몸을 낮추고 삼가는 몸가짐으로 출입하기 위함이다. 익공식 맞배지붕에 

겹처마이며 삼문의 창방 위를 화반(花盤)으로 장식하였고 신문 양쪽의 봉황은 연화단청문양(蓮花丹靑紋樣:단청으로 

그린 연꽃무늬)으로 조각하여 꾸몄다.

 제례가 시작되기 전에 헌관은 이 내삼문 단하(段下)에서 북향립(北向立:북쪽을 향하여 섬)하였다가 홀창(笏昌:제례의 순서부름)

에 따라 집사의 안내를 받아 계단을 오른다. 앞 뜰에는 매년 공의 탄신제(4월 28일) 때 중요무형문화재 제 21호인 

승전무(勝戰舞)가 시연(施演)된다.

강한루

 제172대 통제사 이승권(李升權 : 이충무공 8세손)이 1840년에 지은(1840) 누각.

옛부터 충렬사를 찾은 많은 시인 묵객들이 이 누대에 올라 이 충무공의 큰 덕을 되세기며 동백 고목과 더불어 후원의 푸른 

죽림을 자주 시제에 올렸던 영남 유수의 수영(水營) 누각(樓閣)이다.

  전형적 조선의 팔작지붕 양식으로 정면 세칸, 측면 세칸의 익공식 이층 구조에 아래 층 뒤편에는 통용문인 「영모문」현판이 

걸려있으며 이층 누마루는 우물마루에 계자난간을 두르고 연등천장을 하고 있다. 

* 강한루의 이름 유래
강한(江漢)은 중국(中國) 호북성(湖北省)의 성도(省都)무한(武漢)에 있는 地名이다.

무한(武漢)을 가로질러 흐르는 장강(長江)과 지류(支流)인 한수(漢水)가 합류하는 지역으로 장강(長江)에서 「강(江)」,한수(漢水)

「한(漢)」,이두자(李)를 취하여 강한(江漢)이라 부르며 예로부터 열국이 각축하던 삼국지의 무대이며 이름난 경승지(景勝地)이다.


  이 강한(江漢)의 대안(對岸)에는 이백(李白)의 시(詩)에 등장하는 황학루(黃鶴樓)와 항주(抗州)의 서호(西湖)와 비견(比肩)되는 

동호(東湖)가 있다.

  또 고대(古代) 주(周)나라 때 이곳 강한변(江漢邊)에서 소호(召虎)가 적의 항복을 받아 나라의 우환(憂患)을 씻었다는 

고사(古事)가 있다.

  1840년 제172대 통제사 이승권(李升權)이 여기에 누대(樓臺)를 지을 때 시인 강위(姜偉)가 경승지 통제영과 이충무공의 

위업을 이 강한의 고사에 연관지어 강한루(江漢樓)라 이름하였다고 전해진다.

충렬사의 나무들은 전부 기품이 있어 보인다.


숭무당

통제영에서 파견한 장교 3명이 상주하면서 사우(祠宇)와 위토전답을 관리하던 곳.
지금은 회의실과 강의실로 사용하고 있다.

제1호 비각 충렬묘비명

묘(廟)는 사당을 뜻하고 비명(碑銘)은 비에 새긴 글이다. 충렬묘비명은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공적을 기리고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이 왕명을 받아 글을 짓고 뒤에 (1861) 민섬(閔暹) 통제사가 비와 비각을 세웠다.
   글은 우암 송시렬(尤巖 宋時烈 : 효종의 스승)쓰고, 문곡 김수항(文谷 金壽恒 : 숙종조의 영의정)이 전서체로 썼다.

6호 비각까지 있다

경충재

제70대통제사 최 숙이 재유사(齋有司 : 관리자)를 두고 지방 청소년들에게 학문과 충의를 교육시키기 위하여 1695년에 건립한 

강당으로 충렬서원이라 불렀다.    

1865년. 1867년 두 번에 걸친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에도 이순신 사당 가운데 유일하게 존속된 유서 깊은 서원이다.

지금은 공신과 집사들의 회의실로 사용하고 있다.

중문

 외삼문과 내삼문의 사이에 있는 가운데 문으로 안으로 들어서면 동제와 서제가 있다. 
입구 양쪽에 있는 고목은 목련과의 태산목이다.

동재

동재

 향사를 앞두고 헌관(獻官 : 제관)과 집사(執事)들이 미리 여기에서 몸과 마음심을 깨끗이 하고 제복을 차려입는 곳으로 향사를 

끝낸후 여기에서 음복(飮福)을 한다.

   김 경 제51대통제사가 맞은 편의 서제와 동시(1670)에 건립하였다. 동·서제의 마당을 중정(中庭:가운데 뜰)이라 하는데 매년 

4월 28일 탄신제 때에는 여기에서 승전무(중요무형문화재 제10호)가 헌무(獻舞)된다.

서재

향사에 쓰이는 제물을 장만하고 제기(祭器)와 제구(祭具)를 보관하는 곳. 김 경 제51대통제사가 맞은 편의 동제와 동시(1670)년에 건립하였다.

   전시된 거북선은 전라좌수영의 거북선 모형으로 제작년대는 1950년대로 추정된다.

서재

정당

정당은 민족의 수호신,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영령에 제사올리고 공의 정신과 위훈을 만대(萬代)에 기리기 위하여 제7대 

통제사 이운룡(李雲龍)이 선조(宣祖: 제14대)의 명을 받아 세웠다. 이충무공 한분의 위패를 모시고 역대 통제사가 약 300년간 

제사를 받들어 온 가장 신성한 장소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목조 맞배지붕으로 1606년에 창건하였는데 정당의 후원은 

충절을 상징하는 대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있고 기와지붕의 용마루에 새긴 주역(周易) 팔괘(八卦)는 음양의 조화(造化)와 

만물이 화생(化生)하는 역(易)의 원리를 담고 있으며 제의(祭儀)는 정통 유교의 법식을 고수한다. 

1895년 통제영이 폐영되어 관급(官給)이 끊어지고, 경술국치(庚戌國恥:1910년 한일병탄)를 당하여 제사를 받드는 주체가 

없어지자, 이 곳 지방민들이 기미년 독립만세운동(1919)을 계기로 충렬사영구보존회(현 (재)통영충렬사의 전신)를 결성하여 

제향의 맥을 이어왔으나 일제강점기에는 왜경이 장군의 위패를 칼로 부수고, 삼문의 태극문양에 덧칠하여 일장기(日章旗)로

 바꾸고 또 제사를 올리지 못하도록 정당에 못질하는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1945년 광복을 맞아 이승만 대통령, 임시정부의 백범 김구 선생을 필두로 송진우, 여운형, 신익희 등 많은 광복지사들이 

환국 참배하여 건국의 결의를 다진 유서깊은 사당이며 노산(鷺山) 이은상(李殷相) 선생이 국역편찬한 '이충무공전서'의 

산실이기도 하다.


   정당을 향하여 중앙 좌측의 주련은 명나라 진린(陳璘:쳔린) 도독이 이충무공을 찬양한 어록의 한 구절인 「

욕일보천지공(浴日補天之功:해를 씻어 빛나게 하고 하늘의 구멍을 메운 큰 공)」이며, 우측은 이충무공께서 

임전결의(臨戰缺意)하신 「서해어룡동(誓海魚龍動) 맹산초목지(盟山草木知)」에서 따온 것으로 조선 고종조의 명신이자

 예서체의 대가인 신관호(申觀浩) 제187대통제사의 휘필이다.

제단

충렬사 제단 위에는 「충무공 신위(忠武公 神位)」라고 쓰여진 밤나무 위패가 모셔져 있는데 늘 붉은 비단으로 싼 

독(犢 : 신주함)안에 모셔두었다가 향사 때에는 함을 열게 된다.

   정참의 천장은 보 · 도리 · 서까레가 드러나는 연등천장인데 바로 위패 위쪽 한 평 정도 크기의 소란반자(「井」자 무늬 널빤지)

는 단청을 화려하게 칠하였다.

팔사품도 병풍

명나라 신종황제가 조선과 중국을 구한 이충무공의 공적을 찬양하여 보낸 15점의 하사품을 신관호 제 187대 통제사가 그려서

(1861) 정침에 비치한 것이다. 

   신관호 통제사는 개화기의 명신으로 병인양요 때 공을 세우고 한일수호조약 · 한미수호조약의 조선 측 대표였으며 

조선수뢰를 설계, 제작한 엘리트 무신이다.

   특히 정약용을 사숙하고 김정희(추사) 문하생으로 시 · 서 · 화에 능하였을 뿐아니라 예서체의 명필로 문무를 겸전한 

통제사이다.

현자총통

유물전시관

1981년 건립되었다 전시물로는

어제사제문 : 정조대왕이 하사(1795).
충렬사팔사품 : 명나라 황제가 보냄. (보물440호)
이충무공전서 : 통제영수군 파총. 정효현의 그림.
통제영수조도 : 통제영수군 파총. 정효현의 그림.
통제영지도 : 삼도수군통제영의 모항(19세기).
총 통 : 지자총통·현자총통
약수 돌거북
전적류 : 충의고적. 명정서당기. 유영사례
우표 : 외삼문 전경.등이 있다

충렬사 팔사품

명의 수군도독 천린(陳璘) 장군이 이순신 장군의 전공을 명황제에 보고하자 명의 신종(神宗)이 그 전공을 치하하여 보내준 

포상물이다.

  장군의 의장물로서 통제사가 높은 장막(帳幕)위로 오르면 측근인 비장(裨將) 두 사람이 우립(羽笠)을 쓰고 홍첩리(紅帖裏)를 

입고 어깨에 영패를 메고 선다.

그리고 네 사람의 군관(軍官)이 귀도와 참도를 각각 어깨에 메고 독전기(督戰旗).

홍소령기(紅小令旗)·남소령(藍小令旗)를 들고서 앞에 갈라선다.

팔사물·팔사품 또는 명조팔사품 등 여러 개의 명칭으로 불리어 왔는데 1966년 문화관광부에서 보물 제440호 「통영충렬사 

팔사품」으로 명명(命名),지정하였다.



머물러 있을수록 몸 가짐을 고쳐 보게 되는 경건한곳이다


☞ 8월4일 아내,친지


728x90
그리드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