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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空空)의 시선

인상 깊은곳/서원_향교

( 청도 여행 ) 임호서원,경의관

空空(공공) 2017. 2. 10. 0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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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 고택을 보고 신지 고택마을을

보기 위해 내려 가려는데 서원이

하나 보인다

차를 세워 확인을 했는데 지자체 관광

지도에는 겨우 보일정도로 아주 작게

표기가 되어 있다

"임호 서원"이라고 되어 있다

역시나 서원은 문이 굳게 잠겨져 있다

 

문중의 관리가 여의치 않은것은 이해가 되나 서원 역시 문화재이거늘 행정 당국의 적절한 개입과

지원이 필요해 보인다

 

이곳은 국가 보물을 소장하고 있는 곳이기도 한 모양이다

그런데 문제가 좀 있어 보인다

"임호 서원"은 임진 왜란 당시 의병 활동을 하였던 박경신을 배향하였던 곳이고 특히 그와 그의

아들과 관련된 4종 17점의 책과 고문서가 보물 제 1237호로 지정되어 임호 서원옆 경의관에 보관되어

있는데 어찌된 연유인지는 모르겠으나 전시 관련 다툼으로 전시가 유보되어 있는 상태인것 같았다

( 임호 서원 )

 삼우정 박경신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선생은 소요당 박하담의 손자이고 무과에 급제하여 임진왜란때는 청도 조전장으로 의병진과

연합하여 큰 공을 세워 선무원정공신에 올랐다.

선생은 한강정구 망우당 곽재우등과 교의가 두터웠고 뒤에 병조참판이 증직되고

숭의사에 향배하였다.

(  밀성박씨 삼우정파  종중 소장 문적 : 보물 제 1237호)

이 문적은 청도에서 임진왜란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던 밀성박씨문중(密城朴氏門中)의 박경신(朴慶新)과 그의 두 아들인 지남(智男)ㆍ철남(哲男)과 관련된 4종 17점의 책과 고문서이다. 그 내용은 박경신에게 내사(內賜)된 선무원종공신녹권 1책, 순조 연간 박경신 부부에게 증직된 교지 2매, 만력 7년 박경신의 무과전시 장원(武科殿試 壯元)을 축하하기 위해 모친 장씨(張氏)가 급여한 별급문기(別給文記) 1매와 박경신, 지남ㆍ철남 3부자에게 내리 포상문서인 절지수(節祗受) 13매이다. 절지수 중에는 박경신의 것이 8매, 지남은 2매, 철남은 3매이다.
 박경신의 자(字)는 중선(仲宣), 호(號)는 삼우정(三友亭), 본관은 밀성(密城)이다. 1569년(선조 2) 31세 때 무과 초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복시에 급제하였으며 3년 후인 35세때 전시(殿試)에 장원급제하였다. 이후 여절교위 훈련원 판관(勵節校尉 訓練院 判官), 선천 병마첨절제사(宣川 兵馬僉節制使), 정략장군 훈련원 첨정(定略將軍 訓練院 僉正), 양근병마동첨절제사(楊根兵馬同僉節制使) 등에 제수되었다. 임진왜란 때 선조를 호위하여 피난하고 고향인 청도에서 두 아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왜병을 물리치고 청도를 수비하였다. 1594년(선조 27) 56세에 순직하였는데 임진왜란 후 선무원종공신 1등,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 2등에 책훈되었고 임호서원(林湖書院)에 배향되었다.
 장남인 지남(智男, 1565~1611)의 자(字)는 인경(仁卿), 호(號)는 계애(溪崖)이다. 그는 아버지의 의병 창의에 가담하여 청도ㆍ밀양ㆍ영천ㆍ경주 등지의 전투에 참전했다. 무과에 급제하였고 임진왜란 후 선무원종공신 2등에 책훈되었으며 임호서원 경의사(景義祠)에 배향되었다. 철남(哲男, 1565~1611)은 지남의 쌍둥이 동생으로 아버지와 함께 청도ㆍ밀양 등지에서 3부자가 함께 의병에 참가하여 많은 공을 세웠으며 사복시(司僕寺) 사복(司僕), 금위영(禁衛營) 천총(千摠)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 후 선무원종공신 2등에 책훈되었으며 임호서원에 배향되었다.

                                           ( 경상북도 문화재 사이트에서 인용)

 밀성박씨 삼우정파 종중 소장 문서

안내 표지판은 이렇게 되어 있었으나...

역시나 문이 잠겨 있다

경의관 문도 잠겨 있었으나 옆 담장이 없어 문은 있으나 마나

문에 붙어 있는 전시물 관계로 개관이 늦어진다는 공지

경의관

문틈으로 찰칵

뒤로 돌아 가니 낮은 담장

안이 잘 보인다 ㅋ

문을 열지 못하는 원인이 아무쪼록 잘 해결 되어 많은 사람들이 찾을수 있도록 해서

종중의 긍지로 삼는게 더 좋을텐데...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