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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空空)의 시선

버킷 실천하기/제주 올레길 걷기

(제주) 관덕정, 제주목 관아

空空(공공) 2022. 11. 30.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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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레 17코스에서 볼 수 있는 문화재로는 보물인 관덕정이 있다

( 제주는 아직 국보가 없다 보물인 탐라순력도를 국보 지정 추진 중이다)



제주의 보물은 관덕정을 비롯 탐라순력도 외 총 9점이 있다

그리고 사적인 제주목관아가 있다


17코스 마지막 부분에 있어 다리는 힘들었지만 천천히 돌아보았다



 ▶ 관덕정

  제주시내 중심부에 위치한 제주 관덕정은 제주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 중의 하나다.

‘관덕(觀德)’이란 문무의 올바른 정신을 본받기 위해 ‘사 자 소 이관 성덕야(射者所以觀盛德也)’

에서 따온 말로, 평소에 마음을 바르게 하고 훌륭한 덕을 쌓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누정 건물은 『탐라지』에 의하면 조선 세종 30년(1448) 안무사 신숙청이 병사들의 

훈련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세웠다고 하며, 성종 11년(1480) 목사 양찬이 고친 뒤 

여러 차례 수리를 거쳤다. 

지금 있는 건물은 1969년 보수한 것으로 원래의 건축 수법은 17세기 전후의 것으로 추정한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4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 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건물은 사방이 탁 트이게 뚫려 있고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새부리 모양으로 뻗쳐 나온 

재료를 기둥 위에 두 개씩 짜 놓았다.

관덕정의 편액은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安平大君)의 글씨였으나 화재로 손실되어 

현재의 글씨는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의 작품인 것으로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이 지은 『남사록』에 의해 밝혀졌으며, 지붕 처마가 긴 것이 특징이었는데 

1924년 일본인들이 보수하면서 처마 부분을 많이 잘라냈다.

제주 관덕정은 제주도의 대표적 누정 건축으로 건축사 연구의 소중한 자료이며 

건물 안쪽 대들보와 그 아래에 그려진 작자를 알 수 없는 벽화도 상당히 

훌륭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 문화재청 국가 문화유산 포털에서 )


 
▶ 제주목 관아 

 조선시대 제주지방 통치의 중심지였던 제주목 관아는 지금의 제주 관덕정(보물 제322호)을 

포함하는 주변 일대 주요 관아시설이 자리하였던 곳으로 탐라국 이래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제주의 정치·행정·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해왔다.

관아시설은 1434년(세종 16) 관부의 화재로 건물이 모두 불타 없어진 뒤 바로 역사를 

시작하여 그다음 해인 1435년에 골격이 이루어졌으며, 조선시대 내내 증·개축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제주목 관아는 일제강점기 때 집중적으로 훼철되어 관덕정을 빼고는 

그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에 제주시에서는 1991년부터 1998년까지 4차례 발굴조사를 진행한 결과, 탐라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여러 문화층과 함께 제주목 관아의 주요 시설이었던 동헌·내아 건물터 등의 

위치와 규모를 확인하였다.

1993년 3월 30일에 제주목 관아지 일대가 사적 제380호로 지정되었고, 

발굴 과정에서 확인된 초석·기단석 등을 토대로 하고,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와 

『탐라 방영 총람(耽羅防營總攬)』 등 당의 문헌 및 중앙문화재위원·향토사학가·전문가 등의 

고증과 자문을 거쳐 지난 2002년 12월 복원공사를 완료하여 제주 고유의 역사적 숨결을 

전해주고 있는 장소이다.



○ 외대문(外大門) : 제주목 관아 건물로 통하는 영문의 대 문루

외대문은 문헌에 ‘진해루(鎭海樓)’, ‘탐라 포정사(耽羅布政司)’ 로 표기되어 있다. 

관아의 관문으로 1435년 홍화각(弘化閣) 창건 시에 건립했다고 전하며, 

1699년 남지훈(南至薰) 목사가 개 건했다고 한다. 2층 누각 건물로 종루(鐘樓)로도 활용되었다.



○ 연희각(延曦閣) : 제주목사의 집무처

연희각은 목사가 집무하던 곳으로 상아(上衙)의 동헌(東軒), 목사의 정아(正衙) 등으로 불렸다. 

상아라 한 것은 판관(判官)의 집무처인 이아(二衙)와 구분해 명명된 것이다. 

이원조(李源祚) 목사의 『연희 각기(延曦閣記)』에 의하면 “연희각은 예전에 기문(記文)이 없어서 

건치(建置) 연월일을 상세히 알 수가 없다. 

현판도 누가 명명하고 누가 쓴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건물은 겹처마에 깊숙한 지붕으로 좌대(座臺) 위에 높게 지어져 있다. 

그 이름을 연희(延曦)라고 한 것은 외신(外臣)이 충성을 다하고자 하는 정성을 표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 홍화각(弘化閣) : 절제사의 영청으로 사용하던 공간

홍화각은 예전에 절제사가 사무를 보던 곳이다. 

1435년(세종 17) 최해산(崔海山) 안무사가 창건한 뒤 1648년(인조 26)에 김여수(金汝水) 목사가 

중수하였으며, 1713년(숙종 39)에 방어 영(防禦營)으로 승격되어 별도로 정아(正衙)를 

설치함에 따라 이 홍화각은 영리청(營吏廳)이 되었다. 

‘홍화각’이라 명명한 것은 왕의 어진 덕화(德化)가 백성에게 두루 미치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붙여진 것이다. 

또한 홍화각은 탐라 고각(耽羅古閣)이라 불리었을 정도로 관아 건물 중에서 뛰어난 건물이었다.



○ 우련당(友蓮堂)

우련당은 1526년(중종 21)에 이수동(李壽童) 목사가 성(城) 안에 우물이 없으면 

적이 침입하여 성을 포위하거나 화재가 발생하였을 때 구급하기 어렵다 하여, 

못을 파고 물을 가두어 연꽃을 심은 뒤 그곳에 세웠던 정자이며 연회 장소로 사용되던 곳이다. 

그 뒤 영조(英祖) 때에는 김정 목사가 다시 정자를 중수하고 못 가운데 석대(石臺)를 쌓아서 

꽃과 대나무를 심고 향의실(享儀室)이라 개명하여 공물(貢物)을 봉진 하는 장소로 사용하였다.



○ 영주협당(瀛洲協堂) : 목사를 보좌하는 군관들이 근무하던 관청

영주협당은 원래 군관(軍官)들이 근무하던 관청이었다. 

창건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예전의 군관청(軍官廳)이 영(營)·목(牧) 소속으로 분리될 때 

영군 관청(營軍官廳)이 되었다. 

군관의 수는 원래 15인이었으나 효종(孝宗) 초기에 이경억(李慶億) 어사가 

조정에 건의하여 10인으로 줄였다.



○ 귤림당(橘林堂) : 제주목사가 고즈넉한 여유를 만끽하는 장소

귤림당은 거문고를 타고 바둑을 두거나 시(詩)를 지으며 술을 마시는 장소로 이용되던 곳이다. 

1743년(영조 19) 안경운(安慶運) 목사가 개 건하였고, 1769년(영조 45)에 다시 중수한 뒤 

건물이 노후(老朽)하여 이원조 목사가 1842년(헌종 8)에 다시 중수하였다.



○ 망경루(望京樓) : 임금님의 은덕을 기리는 공간인 동시에 제주 앞바다로 

                              침범하는 왜구를 감시하는 망루 역할

망경루는 북두성(北斗星)을 의지하여 임금님이 있는 서울을 바라보며 그 은덕(恩德)을 기

리는 신지(信地)이며 중요한 제주목관아의 하나였다. 

1556년(명종 11) 김수문(金秀文) 목사가 창건한 뒤 1668년(현종 9) 이인(李土寅 ) 목사가 

개건하였고, 1806년(순조 6)에는 박종주(朴宗柱) 목사가 중수하였다.





 

제주 관덕정과 제주목 관아를 둘러 봄으로 이전 제주의 역사를 이해할 수 있었다


☞ 10월 8일 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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