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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空空)의 시선

인상 깊은곳

( 경주 여행 ) 경주 김유신 장군묘-살아서는 일인자 같은 이인자,죽어서는 왕이 된 김유신 장군

空空(공공) 2020. 5. 13. 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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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전 김유신 장군에 대한 글을 읽고 한동안 머릿속에 생각이 남아 있다 급기야는 꿈도 꾸게 된것 같다

자세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김유신 장군"에 대한 꿈인것만은 확실하다


그러던 차에 근로자의 날 휴일이기도 하고 해서 혼자서 경주를 찾았다 ( 코로나 이후 가장 먼 나들이길이다 )

경주를 권역별로 나누어 틈틈이 찾아 가고 있는데 이번에는 "김유신 묘"가 있는 서악권이다


경주 서악권은 경주 시내 서쪽으로 화랑들의 자취를 찾아볼수 있는 유적지가 산재해 있는곳이다

오늘은 무리하지 않고 김유신 장군 묘,그리고 무열왕릉과 서악동 고분군만 찾아 보기로 했다


김유신 장군은 우리나라 역사상 '이순신 장군" 과 더불어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장군이다

그리고 전장에서 계백 장군과의 최초 전투 이외는 패배한 적이 없기도 하다


김유신(金庾信, 595년 ~ 673년 8월 18일 (음력 7월 1일))은 신라의 화랑의 우두머리였으며 태대각간이였고 

신라에 귀순한 가야 왕족의 후손으로서,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정복하고 당나라군을 격퇴하며 삼한일통을 

이루는 데에 중추적인 역할을 한 신라의 명장군이며, 정치가이다.

태종무열왕과 문무왕을 도와 신라의 삼국 통일 전쟁을 보좌하였으며, 진평왕부터 문무왕에 이르는 다섯 명의 

왕을 섬겨 신라 정권의 중추적 인물로 성장하였다. 신하로서 왕으로 추봉된 유일한 인물이며, 무열왕의 즉위 

및 삼국 통일 전쟁 등에 기여한 공적을 인정받아 왕족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순충장렬흥무대왕(純忠壯烈興武

大王)으로 추존되었다. 

신라를 포함하여 고려와 조선에 이르기까지 성신(聖臣)·주석지신(柱石之臣)으로 추앙받았다. ( 위키백과 인용)


또한 관창, 사다함과 함께 신라의 3대 화랑이다.


오전에 잔무 처리를 하느라 조금 늦게 김유신 장군 묘에 도착을 하였다

근로자의 날이고 휴무일이지만 이곳을 찾은분은 그렇게 많지 않아 보였다


매표소

입장료가 있다 개인 2천원

신라 태대각간 순충장열 흥무대왕 김유신 신도비가

이곳에 모셔져 있다

현재의 비석과 비각은 1966년에 세워진것이다

김유신묘 출입문 "흥무문"


경주 김유신묘 사적 제21호

  지정(등록)일 1963.01.21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충효동 산7-1번지 림

  시 대         통일신라 문무왕13년(674)


경주 송화산 동쪽 구릉 위에 자리잡고 있는 신라 장군 김유신의 무덤이다. 

무덤은 지름이 30m에 달하는 커다란 규모이며, 봉분은 둥근 모양이다. 

봉분 아래에는 둘레돌을 배치하고 그 주위에는 돌난간을 둘렀는데, 둘레돌은 조각이 없는 것과 12지신상을 

조각한 것을 교대로 배치하였다. 12지신상은 평복을 입고 무기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몸은 사람의 형체이고 

머리는 동물 모양이다. 조각의 깊이는 얕지만 대단히 세련된 솜씨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처럼 무덤 주위의 둘레돌에 12지신상을 조각하는 것은 통일신라 이후에 보이는 무덤양식으로, 

성덕왕릉으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김유신이 죽자 흥덕왕(興德王)은 그를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받들고, 왕릉의 예를 갖춰 

무덤을 장식한 것으로 보인다. 

또 『삼국사기』에는 김유신이 죽자 문무왕이 예를 갖추어 장례를 치르고 그의 공덕을 기리는 비를 세웠다고 

전한다. 

그러나 현재 그 비는 전하지 않고 조선시대에 경주부윤이 세운 '신라태대각간 김유신묘'의 비만 남아있다. 

                                                  ( 문화재청 국가 문화 유산 포털에서 인용 )

 


무덤은 능선상의 완만한 경사를 깎아 평지를 마련한 곳에 조영했는데, 신라의 역대 왕릉 가운데 가장 넓은 부지를 

차지하고 있다. 직경 15.8m에 높이는 5.6m이고, 묘제는 횡혈식 석실분에 해당한다. 봉분 자락에는 면석과 

탱석(각각 24개씩)을 사용한 호석 구조를 하고 회랑을 따라 난간석(38개)를 두르고 회랑에는 박석을 깔았다. 

탱석에는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이 부조되어 8세기 후반에서 9세기 전반에 이르는 기간 동안 조영된 전형적인 

신라 왕릉의 형식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십이지신상의 각각은 평복에 무기를 잡고, 헌덕왕릉이나 

황복사터 금당지에서 나온 십이지신상과 마찬가지로 고개를 돌리고 있는데, 성덕왕릉이나 원성왕릉의 것과 같은 

석사자상이나 석인상 같은 것은 배치되어 있지 않다.


뒤로는 옥녀봉으로 오르는 등산로다

그런데 학계 일각에서 이 무덤은 김유신묘가 아니고 신무왕의 무덤이라는 설도 있는데 

앞으로 규명되어야 할일이다.


이곳을 와 봤었는지는 기억에 없다.

이젠 기억을 할것이다

☞ 5월 1일 혼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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