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긴 몇번 온곳인데도 이상하게 글을 올린게 없다.(이번에도 3일에 걸쳐 글을 쓰고 올린다)
대구 팔공산의 동화사는 두말이 필요 없는 유명한 사찰이다.
한국 불교의 대표 총림으로 조계종 종정예하이신 진제 법원 대종사께서 주석하시며 선원, 율원, 강원에
100여 명의 대중이 상주하며 여법히 정진하는 청정 수행도량이다.
세계최대의 석불인 약사여래대불을 비롯한 수많은 보물과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는 동화사는 2008년 중국
에서 열린 제5회 국제관광박람회에서 동아시아 10대 관광명소로 지정되어 연중 내내 수믾은 내외국인들이
참배하는 동양의 대표 성지이기도 한다.
찾은날도 이른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2명의 대만의 젊은 남여 방문객이 길을 물어 가르쳐 주기도 했다.
중국 관광객이 많이 오는지 곳곳에 중국어 안내가 되어 있었다
국내에는 8대 총림이 있는데 동화사도 여기에 해당한다
☞ 국내 8대 총림 : 총림은 여러 승려들이 화합하여 함께 배우며 안거(安居)하는 곳이다]선원(禪院) ·
강원(講院) 등 제반 시설을 갖추고 여러 승려가 수행하는 도장이며, 총림의 최고지도자를 방장(方丈)이라
부른다.
한국 불교의 조게종에는 해인사 · 송광사 · 통도사 · 수덕사 · 백양사의 다섯 사찰이 선원과 강원을 모두
갖추고 있어 이들을 오대 총림이라 하였는데, 2012년 11월 7일 대한불교 조계종 중앙종회는 제192회
정기회의에서 동화사 · 쌍계사 · 범어사의 세 사찰을 만장일치로 총림으로 추가 지정하였다.
이에 따라 팔대 총림이 있게 되었다.
동화사는 493년에 극달이 창건하여 유가사라 하였다.
그 뒤 832년(신라 흥덕왕 7년)에 왕사 심지가 중창하였는데, 그때가 겨울철인데도 절 주위에 오동나무꽃이
만발하였으므로 동화사로 고쳐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삼국유사>에는 진표율사에게서 영심에게 전하였던 불간자(佛簡子)를 심지가 다시 받은 뒤,
팔공산에 와서 불간자를 던져 떨어진 곳에 절을 이룩하니 곧 동화사 첨당 북쪽의 우물이 있는 곳이라는
이야기가 실려있다.
역사적으로는 견훤의 군대에 대항하는 왕건의 군사 주둔지였으며 조선시대에는 사명대사 유정의 승병
훈련지이기도 했다
31본산의 하나로 일대 55개의 사찰을 거느렸던 대본산(大本山)이었으며, 현재는 대구광역시와 청도군,
칠곡군, 성주군의 사암(寺庵)을 관장하고 있다.
1992년 평화통일의 발원을 담은 약사여래대불을 조성하였다.
동화사로 가는 출입구는 2곳이다 ( 봉황문과 동화문 )
약사여래대불로 가려면 봉황문이 가깝고 동화사 대웅전쪽은 동화문이 가깝다
동화문은 최근 공사를 해서 새로운 모습이다
동화문
동화사는 입장료(관람료)및 주차 요금이 있다
입장료 2,500원/성인 1인 주차요금 2,500원
동화문 매표소동화
동화매점
동화지를 지나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면 바로 동화사다
용호문
다른 사찰에서는 사천왕문에 해당하는 곳으로서, 2003년 낙성하였다. 문 내부의 양측에 동방 지국천왕,
남방 증장천왕, 서방 광목천왕, 북방 다문천왕 등 사천왕상이 모셔져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맞배지붕의 구조로 되어있다.
봉서루
'봉황이 깃든 누각' 이란 뜻으로 동화사를 대표하는 누각이다. 현재는 주로 제사나 재를 지내는 장소로
사용된다.
대웅전을 향해서는 유리로 문을 하여 큰 법회시 봉서루에서도 대웅전을 향해 법회에 동참할 수 있다.
동편에는 지장보살님을 모시고, 그 좌우에 영구위패롤 모셨다.
봉서루는 네모난 돌기둥을 세워 누문을 만들고, 그 위에 정면 5칸의 목조 누각을 세운 독특한 건축양식이다.
누각으로 오르는 계단 중간에 널찍한 자연석이 하나 놓여 있다. 이곳이 봉황의 꼬리 부분이며, 누각
오른쪽 귀퉁이에 있는 둥근 돌은 봉황의 알을 상징한다.
봉서루 뒤편에는 대웅전을 향해 '영남치영아문'의 현판이 걸려 있다.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영남도총섭으로 동화사에서 승병을 지휘했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현판이다.
11월 16일인데도 감이 달려 있었다
통일범종루
봉서루 동편에 인접해 있는 누각이다. 원래 원음각에 범종이 있었으나, 종이 작고 장소가 협소하여 새로
누각 형태로 지었다. 범종과 법고, 운판, 목어 등 사물을 갖추고 있다.
예불시에는 법고, 범종, 목어, 운판의 순서로 사물을 친다. 범종은 지옥 중생을 비롯하여 일체 중생의
해탈을 위해, 법고는 축생의 고통을 쉬게 하기 위해 사용하는 법구이다.
목어는 수중 중생을 위해, 구름 모양을 새긴 운판은 허공 세계에 사는 중생인 날짐승의 해탈을
염원하면서 친다.
통일범종루의 목어는 굳게 다문 입에서 돌출된 날카로운 이빨과 부릅뜬 눈을 가진 잉어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법고는 높이가 두어 길 되는 큰 북으로 영남 승군을 호령하던 승군 본영이 동화사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통일약사대불과 짝을 이루어 통일을 염원한다는 뜻으로 통일범종루라고 이름 지었다.
육화당 ( 종무소)
부처님께서는 공동생활에서 모든 사람이 염두에 두어야 할 여섯 가지의 중요한 윤리덕목(倫理德目)을
말씀하셨는데 이것을 육화(六和)라 한다.
육화(六和)는 신, 구, 의, 계, 견, 리(身, 口, 意, 戒, 見, 利)로서,
첫째는, 몸으로 화합하여 동주(同住)하여 같이 살고, 둘째는, 입으로 화합하여 다툼이 없으며(無諍),
셋째는, 뜻으로 화합하여 어김이 없으며(無異), 넷째는, 계율을 화합하여 같이 지키며,
다섯째는, 견해를 화합하여 같이 행하며, 여섯째는, 이익을 화합하여 고르게 나누어가지는 것이다.
이러한 육화의 정신은 대통합을 상징한다.
종무소를 육화당이라 이름 지은 것은 소임을 사는 데 있어, 원융화합을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본 연유이다
동화사에 이날 고양이가 참 많이 보였다
전형적인 고양이 자세
법화당
대웅전 서편에 ㅁ자 형태로 위치한 건물로, 현재 강원(講院)으로 사용하고 있다. 3,4학년 학인들이 공부하며 거처하는 건물이다. 강원 교과과정 중 대승종교인 법화경에서 따온 이름이다.
대웅전 (보물 1563호)
팔공산을 대표하는 법당이다.
봉서루 누대 밑을 지나 절 안마당으로 들어서면 정면으로 보이는 건물이 대웅전이다.
대웅전은 여러 차례 중창을 거듭하였는데 현재 건물을 조선 후기 영조 3년(1727)에서 영조 8년(1732) 사이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대웅전 축대 아래 양쪽에는 한 쌍의 괘불대와 노주가 있고, 법당으로 오르는 층계는 정면에 반원형으로 쌓아 올렸다. 대웅전 내부 불단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주불로 좌측에 아미타불, 우측에 약사여래불을 모셨다.
또 천장에는 세 마리의 용과 여섯 마리의 봉황이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영산전
대웅전 동편 뒤 담장으로 둘러싸인 별채에 위치한 영산전은 나한전, 또는 응진전이라고도 한다.
법당 안에는 영산회상의 모습을 재현하여 석조 석가삼존불을 중심으로 십육나한상이 좌우로 열좌해 있다. 영산전 현판 글씨는 해사 김성근의 글씨이다. 맛배지붕에 겹처마 형식의 건축으로 1920년 중건하였다. 오른쪽에는 종정예경실이 있다
산신각
산신을 모셔 놓은 당우로 한국 불교 안에 토착 신앙을 수용한 증거라 할수 있다. 산신각에는 호랑이와 노인의 모습으로 묘사한 산신을 조상하여 봉안하거나 탱화로 모시기도 한다.
대웅전 서편 뒤에 위치해 있다.
조사전
동화사를 거쳐간 역대 고승의 영정을 모셔둔 곳이다. 조사전에는 초창주로 알려진 극달화상과 보조국사,
사명대사, 세장, 두여, 의첨, 지화, 총륜, 조계종 초대 종정을 지낸 석우스님 등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대웅전 서편 뒤에 위치해 있으며 18세기 건물이다.
칠성각
대웅전 서편 뒤 맨 위쪽에 위치해 있는 칠성각은 우리나라 사찰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전각이다. 칠성은 수명장수신으로 가람 수호신의 기능도 가지고 있다.
칠성각 안에는 철종 8년(1857)에 그려진 삼존 형식의 칠성탱이 있다.
심지대사 나무
심지대사 오동나무는 칠성각 앞마당에 위치해 있다. 수령이 200년 가량된 오동나무로 심지왕사(心地王師)를 기념하여 심지대사나무로 부르고 있다.
심지대사는 신라 제41대 헌덕왕의 아들로서 15세에 출가하여 승려가 되어 팔공산에서 수도에 정진하고 있었다. 그때 속리산 길상사에서 영심(永深)스님이 진표율사의 불골간자를 전해 받아 점찰법회(占察法會)를 연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으로 찾아가 영심스님에게 간자를 받아왔다.
동화사는 신라 소지왕 15년(493년)에 극달화상이 창건하여 유가사라 부르다가 흥덕왕 7년(832년) 심지대사가 중창할 때 한겨울인데도 오동나무가 상서롭게 꽃을 피웠다 하여 동화사로 고쳐부르게 되었다.
수령이 200년 정도 된 이 오동나무는 동화사 중창과 인연이 있을 뿐만 아니라, 파계사 등을 창건하여 팔공산을 불국토로 만들고자 한 심지대사를 기리기 위해 "심지대사나무"라 이름지었다.
서별당
법화당(강원) 뒤 서쪽으로 약간 올라간 곳에 위치해 있으며, 스님들의 요사채로 쓰인다. 금당선원에서 옮겨와 지었다. 대웅전을 기준으로 서편에 위치해 있다.
화장실
내가 가본 사찰 화장실중 가장 깨끗한 화장실이다
안악대사나무
수령이 약 500년 된 느티나무로 설법전 우측에 위치해 있다. 동화사와 인연이 깊은 인악대사를 기리기 위해 인악대사 나무로 명명하였다.
인악대사(仁嶽大師)의 속성은 성산(星山) 이씨(李氏)이며, 법명은 의소(義沼), 이름은 의첨으로서, 영조 22년(1746) 지금의 달성군 화원읍 본리리 인흥마을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신동이라 불리워졌으며, 인근에 있는 용연사에서 공부를 하다가 스님이 되었다. 스승인 벽봉스님으로부터 금강경, 능엄경 등 불교경전을 배워 비슬산, 황악산 등에서 불경을 설파하다가 동화사에 머물렀다.
1796년 용연사 명적암에서 세수 51세, 법랍 34로 입적하였으며, 저서로는 화엄사기, 금강사기, 인악집 등을 남겼다.
동화사 사적비
대웅전에서 통일약사대불로 가는 길에서 해탈교(解脫橋) 앞 모퉁이에 위치해 있다. ‘조선불교선교양종 제일수찰 대본산 경상북도··· 동화사적비명[朝鮮佛敎禪敎兩宗 第一首刹 大本山 慶尙北道··· 桐華寺跡碑銘]’이란 제목으로 동화사의 사적(事跡)을 기록하고 있다. 크기는 비개(碑蓋) 높이 50cm× 가로 350cm이고, 비신(碑身)은 높이 208cm× 가로 203cm이다.
형태는 거대한 화강암을 ‘홀’모양으로 가운데를 파서 다듬은 벽비(壁碑)인데, 비개는 용두(龍頭)로 장식하였다. 당초에 제작한 사적비는 마멸되어 다시 만들었는데, 1931년 3월 주지 황보응(黃普應)이 조성하였다. 비문은 자당거사(藉堂居士) 김정래(金鼎來)가 지었고, 긍석(肯石) 김진만(金鎭萬)이 썼다.당간지주 ( 보물 254호)
금당선원으로 올라가는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다.
당간지주는 당간을 세우기 위해 좌우에 지탱하는 돌기둥이다. 통일신라 때부터 사찰 앞에 설치했던 구조물로서 두 개의 기둥 사이에 기다란 장대(당간)를 세우고 당(幢, 의장용 깃발)을 매달아 이곳부터 사찰 영역이라는 것을 표시하였다. 당간을 끼우는 기대와 당간은 사라지고 지주만 남아 있다.
동화사는 문화재도 많고 역사적인 사찰로 한번쯤은 찾을만한곳이다
통알약사여래대불은 따로 소개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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