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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空空)의 시선

인상 깊은곳/박물관

( 통영 여행 ) 이젠 통영을 대표하는 예술인 윤이상.그를 기린 윤이상 기념관

空空(공공) 2019. 9. 4.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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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하면 예전 지명 충무가 생각나듯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생각나는곳이다.

장군을 제외하면 통영에는 예술,문화부문에 뛰어난 업적을 보이신분이 많다.

우선 토지로 유명한 대소설가 박경리가 통영 태생이며 시인 김춘수, 유치환등이 통영 태생이고  기리는 유적지가

곳곳에 있다.


그리고 또 한분이 있다.

군사정권에 의해 '동백림 사건"으로 간첩으로 몰려 부득이하게 독일로 귀화한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이 있다.

2006년 동백림 사건이 조작되었다는 국정원의 조사 결과가 나오고 2010년 선생의 생가가 있던 자리에 기념관이

세워졌으나 보수 정권에 의해 "도천테마파크"로 불리다 2017년 우연하게 재조명 되면서 "윤이상 기념관"으로

제 이름을 찾게 되었고 선생의 이름을 건 음악콩쿠르와 국제 음악 축제가 매년 거행되고 있다


통영에는 그를 기리는 기념관이 있고 근처에 윤이상 거리가 조성되어 있다.

 

윤이상 ( 1917~1995 )

 14세부터 독학으로 작곡을 시작하였으며, 1935년 일본 오사카 음악학교(大阪音樂學校)에 입학하여 정식으로 작곡을 비롯하여 음악이론, 첼로 등을 배우고 잠시 귀국한 후, 다시 1939에 일본에 건너가 이케노우치 토모지로우[池內友次郞]로부터 작곡을 공부했다.

1943년 항일지하활동에 참가한 이유로 감금을 당하기도 했으며, 해방 후 1952년까지 통영과 부산에서 음악교사로 재직하였다. 1949년 「고풍의상」·「달무리」·「추천」 등이 수록된 가곡집 『달무리』를 출판하였으며, 1953년에 서울로 이주하여 경희대·숙명여대·덕성여대 등에서 후진을 양성하면서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1956년 프랑스로 건너가 1957년까지 프랑스 파리 국립고등음악원(Paris Conservatoire)에서 작곡과 음악이론을 공부하였고, 다시 독일로 가 베를린음악대학(Berlin Hochschule)에서 작곡을 전공한 후, 1959년 동대학을 졸업하였다.
졸업과 동시에 네델란드의 빌토벤과 독일의 다름슈타트 현대음악제에서 「피아노를 위한 다섯 개의 소품」과 「일곱 악기를 위한 음악」이 초연되어 호평을 받았으며 이를 계기로 독일에 체류하게 되었고 유럽 각지에서 활동을 하다가 1964년 독일 포드기금회의 요청으로 베를린에 정착을 하게 되었다.
1965년에 오라토리오 「오, 연꽃 속의 진주여」와, 1966년에 독일의 도나우싱엔 현대음악제에서 대편성 관현악곡 「예악」을 발표하여 국제적인 작곡가로 주목을 받게 되었고, 1965년에 「현악 4중주 1번」과 「피아노 3중주」로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했다.
1967년에는 이른바 ‘동베를린 사건’에 연유되어 2년간 복역을 하였으며 1969년 다시 독일로 돌아가 1970년부터 1971년까지 하노버 음악대학(Hanover Hochschule ful Musik)에서 작곡을 가르쳤고, 1971년에는 독일 국적을 취득하였으며, 1972년에 뮌헨 올림픽 문화행사의 일환으로 위촉받은 오페라 「심청」의 대성공으로 세계적인 작곡가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
1977년부터 1987년까지 베를린 음악대학 교수를 역임하였으며, 1985년에 튀빙겐 대학으로부터 명예박사학위를 수여 받았다. 그리고 1970년에 킬 문화상과 1987년에 독일연방공화국 대공로 훈장을 수여 받았다.
유럽의 평론가들에 의해 ‘20세기의 중요 작곡가 56인’, ‘유럽에 현존하는 5대 작곡가’로 선정되기도 했으며, 1995년에는 독일 자아브뤼겐 방송이 선정한 ‘20세기 100년간을 통틀어 가장 중요한 작곡가 30인’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1990년 10월 평양에서 개최된 ‘범민족 통일음악제’의 준비위원장으로 일하면서 남북한 합동공연을 성사시켰으며, 사망 전까지 함부르크와 베를린 아카데미 회원 및 국제현대음악협회(ISCM)의 명예회원으로 활동했다.
작품으로는 「유동의 꿈」·「나비의 미망인」·「요정의 사랑」·「심청」 등 네 편의 오페라를 비롯하여, 「바라」·「무악」·「예악」·「광주여 영원히」 등 20여 편의 관현악곡, 오보에와 첼로를 위한 「동서의 단편」 등 40여 편의 실내악곡,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 등의 교성곡, 동요에서 오페라에 이르기까지 1백 50여 편을 남겼다.
1977년 루이제 린저와의 대담을 엮은 자서전 『상처받은 용』이 독일과 서울 그리고 평양에서 각각 출판 되었다.
한국음악의 연주기법과 서양악기의 결합을 시도하여, 서양 현대 음악기법을 통한 동아시아적 이미지의 표현에 주력을 하였으며, ‘동서양을 잇는 중계자 역할을 한 음악가’라는 음악사적 지위와 함께 ‘독일 관념철학의 전통이 벽에 부닥친 서양문명의 흐름 속에서 동양사상을 담은 음악으로 세계음악사의 새로운 페이지를 연 작곡가’로 평가를 받고 있다.  


윤이상 기념관

통영시 도천동에 건립된 윤이상 기념관은 통영국제 음악제 사무실(옛 통영군청)에서 직선 거리로 150미터 정도 걸어가면 

도천사거리에 조성되어 있다. 이곳은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1917∼1995년)과 그의 음악을 테마로 한 기념공원으로 

윤이상의 생가 옆 6745m² 부지에 조성되었고 윤이상 선생의 음악세계를 조명할 수 있는 지상 2층 연면적 867.5m² 규모의 

기념전시관과 소공연장이 있다. 이 전시공간은 깨끗하고 현대적으로 잘 만들어져 있으며 전시관에는 선생이 생전 독일 

베를린에서 거주하며 남긴 유품 148종 412점이 있고 독일 정부로 받은 훈장과 괴테 메달을 비롯한 사무집기, 

생전 연주하던 바이올린, 항상 품고 다녔던 소형태극기와 사진 500여 점이 전시되어있다.  ( 통영문화 관광에서 인용 )


도천테마파크에서 윤이상 기념관으로 제 이름을 찾았다

윤이상 선생의 친필

선생이 사용하시던 유품

윤이상 선생의 바이올린

윤이상 선생이 직접 연주한 첼로

음은 이미 하나의 완전한 우주

2018년 2월 25일 베를린에서 통영으로 유해가 옮겨졌다

윤이상 선생의 친필 악보

이번 기회에 윤이상을 알게 되셨다는 친지

윤이상 선생이 베를린에서 생활하던 집을 축소해 재연해 놓은 ‘베를린 하우스’도 새로 꾸몄다. 

이 집에는 윤이상 선생이 베를린에서 직접 사용한 피아노를 비롯해 책걸상·소파 등 가재도구가 실제 모습 그대로 

옮겨져 있다

갔던날 문을 열지 않아 내부 참관은 하지 못햇다


윤이상은 한국에서 태어난 음악가 중 최초로 국제적 명성을 획득한 인물이다.

그런 훌륭한 인물을 과거 정부는 인정을 하지 않았다..

지금에라도 기억하고 존중해야한다


☞ 8월 4일 아내,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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