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련사에서 대동문까지 그럭 저럭 올라와서는 이제 내려 가야 하는데 다른 길로 내려 가 보고 싶었다
마침 국립공원 관리공단 직원이 보이시길래 여쭤 봤더니 공원사무소쪽으로 내려 가는길이 좋을것 같다고
말씀을 하셔서 그길로 내려 오기로 했다
☞ 2018/09/21 - [인상 깊은곳/산_사찰] - 북한산(북한산성) 탐방: 백련사-대동문
★ 북한산 ( 북한산성 ) 탐방 여정
- 백련공원지킴터-백련사 입구-서상일묘-진달래 능선 사거리 ( 1.3KM) -운가사 갈림길-소귀천 계곡 갈림길
대동문 ( 1.5Km )-칼바위 능선 입구-보국문-대성문 (1.2Km )-일선사 삼거리-영취사-북한산 국립공원 사무소
정릉탐방지원센터-정릉탐방 안내소 ( 5.2Km ) 총 9.2Km 휴식 중식 시간 포함 6시간 정도 소요
백제가 수도를 하남 위례성으로 정했을 때 도성을 지키던 북방의 성이다.
백제 개루왕 5년(132)에 세워진 곳으로, 11세기 초 거란의 침입이 있을 때 현종이 고려 태조의 관을 이곳으로 옮겨 오기도 했다. 고려 고종 19년(1232)에 몽고군과의 격전이 있었고, 우왕 13년(1387)에 성을 다시 고쳐지었다. 조선시대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도성 외곽을 고쳐짓자는 의견이 일어나 숙종 37년(1711) 왕명으로 토성을 석성으로 고쳐지었다.
성의 규모는 대서문, 동서문, 북문 등 13개의 성문과 불을 피우던 곳으로 동장대, 남장대, 북장대가 있었다. 성내에는 중흥사를 비롯한 12개의 사찰과 99개의 우물, 26개의 작은 저수지, 그리고 8개의 창고가 있었다. 현재 북한산성에는 삼국시대의 토성이 약간 남아 있기는 하나 대개 조선 숙종 때 쌓은 것으로 여장은 허물어 졌고, 대서문과 장대지·우물터·건물터로 생각되는 방어시설 일부가 남아있다.
이 지역은 고구려, 백제, 신라가 서로 차지하기 위해 쟁탈전을 벌였던 곳이며, 조선시대에는 도성을 지키는 중요한 곳이었다
조선시대 숙종(1711년)때 고려시대의 중흥산성을 바탕으로 축성된 산성이다. 14개의 문, 3개의 장대와 함께 유사시 어가를 북한산성으로 옮길 행궁을 건립하였다. 둘레가 7,620보(步)이다.
수문부터 용암문까지 훈련도감에서, 용암문에서 대성문까지 금위영에서, 수문부터 대남문까지 어영청에서 각각 만들었다.
대동문
국립공원 사무소 직원에게 길을 물었다
성벽을 따라 걸었는데 오르내림이 심했다
옛날 선조들이 대단하단 생각이 자꾸 든다
칼바위능선
곳곳에 버섯이 많이 보였다..
금위영이란 글씨가 보이는듯 하다
보국문
산성주능선에서 바라보는 북한산
노적봉,백운대,만경대
서울시가지가 내려보이는데 날이 흐려 좀 아쉽다
대성문
대성문(大成門)은 보국문과 대남문 사이에 위치한 북한산성의 문으로, 초기의 이름은 대동문(大東門)이었다. 규모는 조선 시대 단위로 높이 13척, 너비 14척이다. 문루는 1990년대에 와서야 우진각 지붕 형태의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복원되었다.
대성문은 해발 620M
한참을 내려와 영취사에 도달했다
영취사 오층석탑
서울특별시 문화재자료 40호
서울 지역에 몇 남지 않은 석탑이다.삭탑의 부재가 비교적 잘 남아 있다
공양이 1시까지인데 마지막 공양을 받았다
미역국을 잔뜩 주셨다
감로수로 목도 축이고
아내는 여기서 108배를 드리고
내려가다 신기한 돌을 봤다
누가 일부러 이렇게 만든건지는 모르겠으나 뭘 닮긴 닮았다 ㅎ
균형을 잘 잡은 돌
북한산국립공원사무소
여기가 예전 그 유명한 정릉계곡이다
등산로 입구 갤러리앞 조형물
요긴 탐방안내소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다
오늘 걸은 걸음수가 24,000보쯤 된다.
내려 가기전 다른곳도 가볼려고 생각을 했는데 도저히 더 돌아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대로 내려가려고 서울역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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