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空空)의 시선

인상 깊은곳

순종황제남순행로,국채보상운동 발상지 광문사터

空空(공공) 2018. 8. 15. 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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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마지막 임금이자 대한제국의 2대 황제인 순종은 비운의 지도자이다

고종과 명성황후의 장남인 그는 왕세자 시절 그의 어머니 명성왕후가 일본 낭인에 의해 시해 되는걸 겪기도 했고

친일 세력에 의해 아편이 든 커피를 다량 음용해 치아가 손상되는일을 겪기도 했다

그는 고종의 뒤를 이어 1907년 제위에 올라 1910년 퇴위할때까지 짧은 통치를 하게 된다

 

1909년 당시 이토 히로부미는 순종황제를 내세워 반일 감정을 무마하고 그의 통감 정치의 정당성을 위하여

순종의 남쪽 지역 방문을 주도 면밀하게 진행한다

외형적으로는 지방의 사정을 감찰하고 백성들의 고통을 살핀다는 명분이었지만 일본의 치밀한 전략에 의해

시행되었던것이다

 

1909년 1월 7일 부터 13일까지 대구,부산,마산을 순행하고 (남순행) 1월27일부터 23일까지 평양,신의주,의주,

개성을 순행했다 ( 서북순행 )

대구의 순종 순행은 이렇게 수치스럽고 치욕적인 순행이었다

 

최근 대구시가 순종순행로에 대한 순행로 조성 사업을 하고 있는데 부근을 다니다가 보게 되었다

 

순종황제남순행로는 북성로-수창초등학교-달성토성으로 이어진다

당시 순종 황제의 행렬 사진

 

국채보상운동의 산실 광문사터

1907년 2월 광문사문회는 특별회를 소집하여 명칭을 대동광문회(大東廣文會)로 개칭하고 회장에 박해령(朴海齡), 부회장에 사장인 김광제를 추대하였다. 또한 일본 동아동문회(東亞同文會)와 청나라 광학회(廣學會)와의 친목 도모 및 교육의 확장을 꾀하였다.
그런데 이 무렵 서상돈·김광제 등 회사 간부들은 1천 3백여만 원이나 되는 국채를 상환하지 못하면 나라가 망하게 될 것이라는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앞의 특별회에서 광문사문회의 개편 문제를 처리한 뒤 서상돈이 국채보상운동을 제안하였다.
참석자들이 모두 동의하자 김광제가 즉시 실현하자고 다시 제의하였다. 참석자들은 그 자리에서 담배를 끊기로 결의하고 국채보상금 2천여 원을 출연하면서 취지를 널리 알리기로 하였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발췌)

수창초등학교

그 당시 수창초등학교 학생들은 황제의 순행을 막으려 했으나 불발되었다

달성토성(공원)앞의 순종 황제 상

나라를 빼앗긴 비운의 마지막 왕이었지만 그래도 순종은 한일 병합 조약애 끝끝내 서명을 하지 않았다

서명을 한것은 당시 총리대신이었던 이완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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