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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空空)의 시선

인상 깊은곳/산_사찰

영조와 깊은 인연이 있는 팔공산 파계사 단풍이 고왔던 파계지

空空(공공) 2017. 12. 10.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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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팔공산에는 대한 불교 조계종

5대본산이자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를

비롯 많은 유명 사찰과 암자들이

있다

 

세어 보지는 않았지만 20여개가 훌쩍

넘어서지 싶다

그중에서 가장 많이 찾았던곳인 파계사를

지난 11월초 다시 다녀 왔다

 

이곳 파계사는 영조 임금과 깊은 인연이 있는 사찰이기도 하다

( 파계사 )

파계'(把溪)는 '물줄기를 잡는다'란 의미로, 본래 절 주위에 아홉 갈래나 되는 물이 흘렀는데, 땅의 기운이 흩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절 아래 연못을 파고 물줄기를 한데 모았다는 데서 이름이 유래하였다고 한다. 조선조에 정리된 《파계사사적기》에는 애장왕 5년(804년)에 심지왕사에 의해 처음 창건되었다고 한다. 현존하는 파계사는 17세기 조선 숙종 때에 이르러 크게 중건된 것으로 현존하는 전각 대부분이 이 시기에 중수되었다.

파계사는 조선 왕실과 연이 깊은 절로 전하는데, 그것은 파계사의 중창자였던 현응(玄應)이 숙종의 부탁을 받고 왕자 생산을 기원하는 백일기도를 올려 그것이 효험을 얻었다는 전설에서 기원한다. 이 백일기도로 태어난 것이 숙빈 최씨 소생의 연잉군, 즉 훗날의 영조(英祖)인데, 실은 전생의 농산 화상으로서 전세의 과보를 받아 현세에 왕실의 자손 즉 국왕 숙종의 아들로 태어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숙종은 연잉군 탄생과 관련하여 현응의 공을 높이 사고, 특별히 파계사 둘레 40리 안팎의 토지에서 거두는 세금을 모두 파계사에서 맡으라는 명을 내렸지만, 현응은 이를 거절하고 대신 파계사에 선왕의 위패를 모시게 해달라는 청원을 올렸다. 선조부터 숙종과 덕종, 영조에 이르는 네 명의 국왕의 신위가 파계사에 모셔짐으로서 숭유억불의 기치가 드높던 조선 후기에도 유생들은 함부로 파계사를 건드리지 못했다고 한다. 실제 파계사 앞에는 '대소인개하마(大小人皆下馬, 신분의 높고 낮음에 상관없이 무조건 말에서 내려라)'라고 새겨진 비석이 남아 있으며, 1979년 6월, 파계사 원통전(금당) 관음보살상 개금불사 당시 불상 안에서 영조가 실제 착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도포가 확인되었다. 이것은 파계사에 전해지는 영조 관련 설화가 신빙성이 있는 것임을 시사하는 한 증거로 여겨지고 있다.

입구 주차장에서 1Km정도 걸어 올라 가야 한다

신도들은 차를 가지고 갈수 있다

파계사 일주문

파계지

아홉개의 물줄기를 한곳으로 모아 축조한 못이다

파계사에는 보물 제1850호인 원통전 이외에도 보물이 2개가 더 있다

종목 명칭 시대 지정일 비고
보물 제992호 대구파계사건칠관음보살좌상및복장유물 조선 1989.04.10
보물 제1214호 파계사영산회상도 조선 1995.01.10
중요민속자료 제220호 영조대왕의 도포 조선 1987.11.23
( 파계사 원통전 ) 보물 제 1850호

원통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구성하고 내부에는 마루를 깔았다. 기단의 가구와 ‘ㄱ’자형 귀틀석의 모습 및 기법은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과 유사한 것으로 보아 건물의 창건 당시인 신라 시기까지 올려 볼 수 있는 고식으로 보인다. 

불상이 모셔진 수미단에는 수미산을 상징하는 각종 문양이 투각되어 있는데, 이들 중 봉황과 학은 국가 안녕과 왕손들의 수명장수를 기원하기 위하여 새긴 것으로 건칠관음보살좌상(보물 제992호) 내부 복장에서 발견된 발원문과 영조대왕 도포와 함께 파계사가 왕실의 원당임을 읽게 하며, 일반적인 수미단에 비해 수작으로 평가된다. 공포의 구성은 내외출목수가 2출목으로 같으며 첨차 상부에 공안(栱眼)이 설치된 것이 있어 고식의 흔적이 보인다. 창호는 정면 3칸에 모두 설치하였다. 배면 양협칸에는 상인방에 문선과 중간기둥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쌍여닫이 판문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파계사 원통전은 상량문 묵서에 의해 1606년 중창되었음이 밝혀진 건물로 고식의 기단을 비롯한 17~18세기의 건물에서 나타나는 다포맞배 건물의 전형적인 공포형식의 특징을 비교적 잘 간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왕실의 원당임을 입증할 수 있는 각종 유물이 온전히 보전되어 있어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서의 가치가 있다.

기영각

불교 사찰인 파계사 내부에 왕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특별히 세워진 당우이다. 다른 이름은 어필각으로 숙종과 영조, 정조의 어필이 이곳에 보관되어 있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모셔져 있던 위패는 1910년 국권강탈로 서울로 옮겨져 현재는 탱화만 걸려 있는 상태이다. 건물은 숙종 35년(1696년)에 성전암과 함께 건립되었다고 전하며, 1974년 1983년에 두 차례에 걸쳐 보수 공사가 이루어졌다.
건물은 화강석으로 바른층쌓기해 쌓은 기단 위에 정면 3칸, 후면 2칸 규모로 겯처마를 한 팔작지붕을 얹었다. 주심포계 양식을 보이면서 주두와 장식이 번잡하게 발달한 조선 후기의 공포 양식을 보여주는 좋은 예로 꼽힌다. 상부의 가구는 5량가인데도 우물천장으로 가렸다.

진동루

원통전으로 올라가기 전에 마주치는 파계사의 누문이다. 정면 5칸에 측면 3칸, 규모는 2층으로 다듬지 않은 네모꼴 주춧돌 위에 둥근 기둥을 세우고 팔작지붕을 얹어, 동화사 봉서루와 마찬가지로 아래층 어칸에 통로를 내었다. 파계라는 이름 자체에 절 주위의 아홉 갈래나 되는 물줄기를 따라 새어나가는 땅의 기운을 막는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데, 파계라는 이름만으로는 이곳의 기를 제압할 수 없다 하여 문에도 진동(鎭洞)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보호수로 지정된 영조 임금 나무

250년된 느티나무

 

뉴턴 ? ㅎ

현응대사 나무

파계지의 단풍이 참 고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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