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空空)의 시선

인상 깊은곳

(진주여행)진주성-촉석루,의암

空空(공공) 2025. 5. 12. 04:20
반응형

 

 

2017년 야간 유등축제를 보러 진주성을 찾았을 때에는 서문으로 입장해 촉석루까지

보았지만 이번에는 촉석문으로 입장해 서문으로 나오게 되었다

지난번은 사람도 많았고 야간이어 제대로 보지 못해 다시 한번 찾겠다고  한 게

8년 만이다

진주성앞 토성




 ▶ 진주성 ( 사적 )

  진주성은 본시 토성이던 것을 고려조 우왕 5년(1379)에 진주목사 김중광(金仲光)이 

  석축하였다.

  조선조 선조 24년(1591) 7월, 경상감사 김수(金수:1537∼1615)는 진주성을 수축하고 

 외성(外城)을 쌓았다. 

 동 25년(1592) 10월, 임진왜란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는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1554∼1592)이

 3,800명의 군사로서 3만여 명의 왜적을 물리쳐 진주성대첩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다음 해인 계사년(1593) 6월에는 전년의 패배를 설욕코자 10만여 명이 또 침략하여 

 끝내 진주성이 함락되고 7만 민관군이 순절하는 비운을 겪었다. 

 동 37년(1604)에는 합포(合浦, 마산(馬山))의 우병영을 진주성으로 옮겨 온 이래로 

 경상우도 병마절도영이 있었고, 고종 32년(1895) 5월부터는 진주관찰부, 건양 원년(1896) 

 8월부터는 경상남도관찰사의 감영이 있었다. 

 그리하여 1925년까지는 경상남도의 도청이 있었다.

 성의 둘레는 1.7㎞이다. 

 성내(城內)에는 촉석루·창열사·의기사·북장대·서장대·영남포정사·국립진주박물관·

 진주성임진대첩계사순의단·촉석문·공북문·호국사 등이 있다.

                                           -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에서 인용



  과거의 진주성은 외성까지 있었는데 일제강점기이 파괴되었고 현재는 내성만 남아있다


  진주성은 입장료가 있다  ( 성인 2천원, 청소년 천 원 )

  2023년에 진주성을 찾은 사람은ㄴ 94만 3천 명에 달한다


  촉석문은 진주의 동문으로 1972년에 복원된 문이다


  ▶ 촉석루

   6.25때 불탔고 이후 복원하였다 

   불타기전에는 국보였으나 지금은 경상남도 유형문화유산이다

   우리나라 3대 누각 중 하나로 고려 고종 28년(1241)에 창건하여 8차례에 걸쳐 중수하였다. 

   남강과 의암, 진주성과 어우러져 천하의 절경을 연출하며 진주 8경 중 제1경을 자랑한다. 

   벼랑 위에 높이 솟았다 하여 이름 붙여진 촉석루는 전쟁 시에는 지휘본부로, 

   평상시에는 향시(鄕試)를 치르는 장소로 활용되었다.



 ▶ 의암

  의암은 임진왜란 때 논개가 왜장을 끌어안고 순국한 바위다. 

  당초 위험해 보여 위암(危巖)으로 불리다가 논개가 순국한 뒤 의암(義巖)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인조 7년(1629년)에 정대륭이 바위의 벽면에 의암이라고 새겼다.

  규모 : 3.65m × 3.3m




 ▶진주 의기사(晉州 義妓祠)

 1593년 제2차 진주성전투에서 성이 함락되자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몸을 던져 순국한 

 의기 논개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다산 정약용의 중수기, 매천 황현 및 진주기생 산홍의

 시판이 걸려있다.




 ▶임진대첩계사순의단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임진년(1592년) 진주대첩을 높이 받들고, 이듬해 계사년(1593년)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장렬하게 순국한 7만 민·관·군의 충혼을 위령하기 위하여 건립



 ▶김시민장군 동상

  임진왜란 때 진주성 대첩을 이루었으며, 충무공 시호를 받음



 ▶영남포정사 문루

  1618년(광해군 10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의 관문이었고 1896년 경상남도 관찰사의 정문이 되어 

  영남포정사라고 하였다. 

 1925년 경상남도도청이 부산부로 옮겨지기 전까지는 도청 정문으로 사용되었다.

 (진주는 1896~1925년 경상남도도청 소재지였다.) 

 문루 앞에는 수령 이하의 사람은 말에서 내려 걸어 들어오라는 뜻의

 ‘수령이하개하마비(守令以下皆下馬碑)’가 있다.



▶북장대

 북장대는 진주성 내 북쪽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한 진주성의 북쪽 지휘소로 전시에 성내와 외성의 

 군사를 지휘하던 곳이다. 

 진남루라고도 부르며 광해군 10년 남이흥이 중건했으며 조선 중기의 다락집 형으로 

 후대 군사시설의 모범이 되었다.




 ▶진주 창렬사(晉州 彰烈祠)

  임진왜란 때 순절한 충무공 김시민 장군 등 39명의 신위를 모신 사당



 ▶ 호국사

  고려시대(高麗時代)에 창건된 것으로 전하는 이 절은 원래의 이름이 내성사(內城寺)였다고 한다.

 고려말기에 왜구(倭寇)를 막기 위해 진주성을 고쳐 쌓고, 승병(僧兵)을 기르기 위해 창건된 것으로
 
 생각되는 이 절은 임진왜란때는 승군(僧軍)의 근거지가 되었다.

 제2차 진주성싸움에서 성과 함께 운명을 같이한 승병들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숙종대에 

 호국사(護國寺)란 이름으로 재건하였다고 전한다.

 최근에 진주성을 정화하면서 일주문(一柱門)자리가 발견되어 새로 세웠으며, 

 사찰의 건물들은 모두 근년에 새로 이룩된 것이다.



  진주성과 진주국립박물관을 돌어 보는데 3시간 조금 덜 걸렸다

☞ 4월13일 아내

728x90

'인상 깊은곳'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청와대  (42) 2025.05.19
경남 하동 화개장터  (27) 2025.05.15
대구 1호 지방정원-'세천늪테마정원  (46) 2025.05.07
청와대 관람예약,관람 동선,관람 유의사항  (19) 2025.05.05
(고령) 대가야생활촌  (29) 2025.04.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