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교촌마을은 2번째로 찾는다
몇년전 친구들과 이 마을을 잠깐 보고
마을 입구에서 식사를 했던 기억이
있다
경주 향교를 먼저 찾아가 차를
주차하고 뒷편 계림과 석빙고를
보고 동부유적지를 지나 첨성대와
대릉원을 돌아보고 다시 교촌마을로
돌아 들어 왔다
경주 교촌은 신라 신문왕2년(682년)에 한반도 최초의 국립대학인 국학이 있던 곳이다
마을의 이름이 "교동" "교촌""교리"등으로 불리운것은 이곳에 향교가 있기 때문이다
신라시대의 국학이 고려 시대에는 향학으로 다시 조선시대에는 향교로 이어진것이다
또한 교촌은 신라시대 원효대사와 요석공주가 사랑을 나눈 요석궁이 있던곳이고. 바른부자의 모습을
보여준 경주 최부자 고택이 있다
경주 최부자는 가난한 이웃을 도우는 한국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곳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 아픔을 가지고 있는곳이기도 하다 ( 교촌마을 누리집에서 일부 인용 )
대릉원에서 걸어 가도 얼마 안 걸리는 거리다
체험 고택들이 많이 있다
경주개 동경이를 볼수 있는곳
여기는 입장료를 받고 있어 밖에서 기웃거리기만..
예전에 여기서 식사를 한것 같다
전통교동 법주를 만드는곳이다
최부잣집은 400년 동안 8대 진사와 12대 만석꾼을 배출한 집안으로 보통 경주 최부잣집 또는 경주 최진사집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경주최씨 최언경(崔彦璥 1743~1804)이 이곳에 터를 잡아 정착하여 약 200년을 이어져 내려왔다.
이전까지는 최부잣집의 파시조(派始祖)인 최진립(崔震立)부터 약 200년 동안 경주시 내남면(게무덤)이라는 곳에서 살다가 교동으로 이전한 것이다.
경주 내남면 개무덤(게무덤)에서 7대를 내려오면서 살았고 교동에서 5대를 만석꾼으로 유지하며 살았다.
1600년대 초 경주 지방에서 처음 가문을 일으킨 최진립에서 광복 직후 모든 재산을 바쳐 대학을 설립한 최준까지,
경주 최부잣집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본으로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단체 관광온 중국인들 너무 떠든다
한소리 해 줄려다 참았다 ㅋ
유명한 교리 김밥
저번에도 길게 줄이 늘어서 있었는데..몇년전이나 마찬가지로 문전 성시다
비단벌레 전기 자동차
월영교는 공사중이었다
안타깝게도 경주 최부자집은 현재 소유권이 영남대학교로 넘어가 있다
자세한 내용은 한겨레 기사를 참고하면 알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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