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제일관은 은은한 조명으로 인해 야간에 참 좋은곳인데 가까이 보는것은 항상 밝은 대낮이다
5년전 보고 글을 올렸을때도 그랬었는데 밤에는 잘 가게 되지를 않는다
2015/08/08 - [인상 깊은곳] - ( 대구 가볼만한곳 ) 대구의 관문 영남 제일관
이번에 걸은 모명재 1길의 마지막 지점이다
이곳에 오기전 "비내리는 고모령" 노래비가 있으니 그걸 보고 와야 된다
▶ 고모령 노래비
<비 내리는 고모령>은 현인이 부른 한국의 트로트 곡이다.
현인과 함께 히트작을 많이 낸 유호와 박시춘 콤비의 작품이다.
유호의 필명인 호동아 작사, 박시춘 작곡의 〈비나리는 고모령〉이라는 제목으로 1948년에 발표되었다.
노래의 배경은 대구 수성구 만촌동에 있는 고개인 고모령(顧母嶺)이다.
일제 강점기에 이 곳이 징병이나 징용으로 멀리 떠나는 자식과 어머니가 이별하던 장소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별의 사연을 담은 노래를 만들었다는 설을 비롯해 유래에 대해 여러 일화가 전한다.
발표 당시에는 이 지역이 경상북도 경산군이었으며, 인근에는 경부선 철도역인 고모역이 있다.
가사는 "어머님의 손을 놓고 돌아설 때엔 부엉새도 울었다오 나도 울었소"라는 슬픈 내용으로 시작하여,
고모령에서 어머니와 헤어진 화자가 오랫동안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그리워하는 심정을 서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노래 속의 고모령은 한 맺힌 이별의 장소로 그려지며 "눈물 어린 인생고개"로 은유되기도 한다.
이 곡은 "어머니의 존재를 녹여 당시 대중들의 가슴을 울"린 민중적인 노래였다는 해석이 있다.
스스로를 "망향초 신세"라 자조하면서 비통하게 향수를 달래는 내용은 태평양 전쟁과 한국 전쟁으로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고향을 떠나거나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했던 격동기의 시대 상황과
잘 어우러졌고, 이후 오랫동안 애창되었다.
1969년에는 임권택 연출로 이 노래의 제목을 딴 동명의 멜로 영화가 제작되기도 했다.
한국방송의 성인가요 프로그램인 가요무대가 2005년에 방송 20돌을 맞아 이 프로그램을 통해 가장 많이
방송된 노래를 발표했을 때, 울고 넘는 박달재와 찔레꽃에 이어 전체 순위 3위를 차지하여 꾸준한 인기를
입증했다.
2001년에는 노래의 무대인 고모령에 노래비가 세워졌다.
앞면에는 노래의 가사가, 뒷면에는 이 노래가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어머니를 향한 영원한 사모곡(思母曲)으로
널리 애창되기를 바란다"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 모명재길 누리집에서 가져 옴)
여기 한켠에 작은 비가 있다
▶김문호 기자 불망비
고모령 노래비 옆에는 김문호 기자 불망비란 조그만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1991년 9월 27일 고모령에 가을비가 내리던 날 한국일보 김문호(당시 29세) 기자가 고모령을 취재하다 열차에
부딪혀 숨졌다. 고모역 바로 맞은편 ‘고모상점’을 운영하는 최정열씨는 “사고 당일 끓여준 라면이
이청년의 마지막 식사가 될 줄은 몰랐다”며 가끔 꽃 한송이에 소주 한잔 올린다“며 안타까워한다.
김문호 기자 불망비의 내용은 이러하다.사진기자 김문호(1963.3.10~1991.9.27)는 경상북도 안동태생이다.
고향에서 안동고등학교를 나와 서울에서 세종대학교를 졸업했다. 언론의 길에 뜻을 세우고 공채시험을 통해
한국일보 기자가 되었다. 늘 밝고 부지런 했으며 남다른 끈질김과 정의감으로 시대의 현장을 뛰고 달렸다,
가을비 내리던 이곳 경부선 철길은 그가 달려간 마지막 현장이다. 고모령 노래비 취재에 열중하다
뒤에서 달려온 열차를 피하지 못하고 순직하니 아깝고 또 아깝다.
29세 젊음을 뜨겹게 마감한 김문호 기자여! 그대의 영원한 기자혼을 이 돌위에 새긴다.
1992. 7. 27. 김문호 기자 1주기에 한국일보 사우일동 한국사진기자회 ( 모명재길 누리집에서 가져 옴)
영남제일관 입구
모명재1길 마지막 이정표
중건기념비
영영축성비
영영축성비는 1737년(영조 13)에 대구 읍성을 완공한 뒤 공사규모와 과정을 기록하여 세운 것이다.
선조 23년에 토성으로 쌓았지만 임진왜란 때 무너진 이후 영조 12년 대구에 부임한 경상도 관찰사 겸
대구도호부사 민응수의 건의를 조정에서 받아들여 축성되었다.
대구 읍성은 1736년 공사를 시작해 동원된 인원만 해도 78,584명이었고 완공된 성의 둘레는 총 2,124보(2,650m),
성 위에서 몸을 낮추고 활이나 총을 쏠 수 있는 방어시설인 여첩(女堞)이 819개,
성의 높이는 서남쪽이 18척(5.5m)이며 남북이 17척(5.1m), 뒤축대의 넓이가 7보, 높이가 3급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비문은 민응수가 짓고 글씨는 백상휘가 썼다.
대구부수성비
대구부수성비는 1869년(고종 6)에 세운 비로, 경상도 관찰사 겸 대구도호부사였던 김세호가 1870년(고종 7) 봄에
성을 대대적으로 보수작업을 시작한 뒤 그해 11월에 마쳤는데 그 사실을 알리기 위해 이 비를 세운 것이다.
원래보다 높이와 크기를 키워서 동서남북의 성벽 위에 4개의 누각을 세웠는데, 누각의 이름은
동을 정해루 (定海樓), 서를 주승루(鑄勝樓), 남을 선은루(宣恩樓), 북을 망경루(望京樓)라고 하였다.
이 비문은 김세호가 지었고 글씨는 당시 공사 책임관이었던 최석로가 썼다.
1906년(광무 10) 대구 읍성이 헐리면서 갈 곳을 잃었다가 1932년 대구 향교로 옮겨 보존되다가
1980년 영남제일관을 세우면서 현재의 자리에 위치하게 되었다.
▶영남제일관
한국에서는 옛날부터 구릉과 산성을 방수의 요충으로 중시하고 평지에 있는 취락에 성지를 축조하는 예가
드물었다.
지금 시내에 있는 달성은 삼국시대 이래 여러 차례 가축된 바 있지만 이것은 읍성이 아니고 오히려 관아를
중심으로 방수한 것이었다. 대구의 평지에 성축 한 것은 부사로 취임한 윤 현(尹峴)때 일이다.
그는 선조 24년에 선산 군위 안동의 3개 읍민을 징집하여 대구부민과 더불어 축성을 완료했다고 대구부사는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이 토성은 1592년(선조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란으로 파손되고 그후 140년이 지난 영조 12년에
석성이 새로 축조되었다. 1601년(선조34년)이후부터 한말까지 대구에 경상동 관아가 있었다.
그것은 그동안 왜란을 겪으면서 대구의 군사적, 정치적, 경제적 중요성이 인식된 때문 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조 때까지 백수십년이 지나도록 임진왜란 때 허물어진 대구부성의 재축조가 실현되지
못했다는 것은 조선왕조 후기사회의 무력을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석축의 대구읍성은 경제력이 회복된
영조 12년에 축조 되었는데 영조 11년에 대구로 부임한 경상도 관찰사겸 대구도호부사 민 응수의 건의를
조정에서 받아 들이고 영조의 윤허를 얻게 된데서 실현을 보게 된 것이다.
축성비에 의하면 영조 12년 4월 8일에 채석을 시작하고 4월 25일에 본성채를 이룩하고 6월 6일까지
여첩(女堞)을 완공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성에는 동,서,남,북의 4정문이 있고, 문에는 본루를 세웠는데
동은 진동문, 서는 달서문, 북은 공북문이라 칭했고, 특히 남문에는 영남 제일관의 편액(扁額)을 달았다.
이밖에 동서에 두 개의 암문이 있었다. 영조 12년에 석축된 읍성은 몇 차례의 수축이 있어서 온전하게
보존해 왔으나 광무 10년과 11년 사이에 남문과 더불어 완전히 헐리고 말았다.
지금 남아 있는 당시의 남문 사진을 보면 성벽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석축기대(石築基臺)를 세웠으며
규모는 하층의 정면 측면이 모두 세칸이다.
남문을 처음 축조한 사람이 관찰사 민 응수이며 그는 경상도 관찰사로
취임하기 전에 전라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전주 풍남문(豊南門)을 세웠다.
대구시는 1980년 남문인 영남 제일관을 수성구 만촌동 금호강변에 옛 모습을 살려 중건함으로 조상의 얼을
시민에게 전하고 있다.
형봉과 제봉
문루에서 보는팔공산
잡상
원래는 궁궐에만 사용하는데 확실치는 않다
대구에도 동서남북 4개의 성이 있었는데 아직도 복원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역사 복원은 후손이 반드시 해야 할일이다
☞ 7월 4일 아내,처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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