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카오톡 채널 추가 버튼
공공(空空)의 시선

공연,전시-연극.컨서트,뮤지컬

( 대구미술관 전시) 이인성 특별전

空空(공공) 2020. 2. 15. 02:00
반응형


내가 대구의 천재화가 이인성을 알게 된건 3년전 산격동에 있는 사과나무 거리의 그림을 보고서이다

 ☞2016/12/01 - [인상 깊은곳] - ( 대구 산격동) 이인성 사과 나무 거리


그 이후에도 가끔 이인성 관련 소식이 들리면 관심을 두곤 했는데 대구미술관에서 이인성 특별전

"화가의 고향,대구"를 한다는 소식을 알고 가 봐야겠다고 생각을 하고 있다 차일 피일 미루고 있다

전시가 끝나간다는 생각에 ( 2019,11.5~2020,1,12 대구미술관  전시 ) 부랴 부랴 다녀 왔다,


이인성은 그 천재성에 비해 이중섭,박수근에 비해 덜 알려져 있다

이인성 기념 사업회에서 이야기하는 이인성에 대해 아래와 같이 소개를 한다


한국 근대화단에서 약관의 나이로 조선미술전람회를 통해 혜성처럼 나타난 아소(我笑) 이인성(李仁星: 1912-1950)은 1930년대 일제 강점기에 '조선의 지보(至寶)', '양화계의 거벽(巨擘)'으로 불리며 명성을 떨쳤다. 그러나 1950년 비운의 총기 오발 사고로 세상을 떠난 이후 그는 역사의 뒤안길에서 점차 대중으로부터 잊혀져 가는 작가가 되고 말았다.

그의 작품과 예술세계는 그 동안 몇 차례의 추모전과 유작전을 통해 일부가 공개된 적은 있으나 작가가 심혈을 기울인 대작들과 예술성 짙은 현존 작품들이 대대적으로 한자리에 전시될 기회는 많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비슷한 연배의 이중섭, 박수근 등이 국민적 화가로 부상하는 동안에도 조선미전 연속 6회 입선(1931-1936) 이후 불과 26세의 나이로 추천 작가에 올랐던 이인성에 대한 일반인의 인지도는 높지 않았다. 그러나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이나 화단에서는 그의 천부적 재능과 조형적 감각에 찬사를 아끼지 않고 있다.

특히, 이인성이 우리 근대화단의 신미술 도입과 정착기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작가로서 맨 앞자리에 설 만하다고 여겨지는 이유는
첫째, 초창기 근대화단에서 수채화가로서의 감각적인 기량과 기법의 숙련으로 탁월한 예술적 업적을 일궈냈다는 점,
둘째, 능수능란한 기량으로 정물화나 풍경화도 많이 제작하였지만 특히 인물화에서 한국적인 인물 표현을 정립하였다는 점,
마지막으로 서양의 인상주의나 후기 인상주의의 화풍을 나름대로 발전시켜 향토적인 서정주의의 한 전형을 이루었고, 해방 이후 그의 향토적 소재와 화면구성, 색감 등이 박상옥, 류경채 등 여러 작가들에게 영향을 미쳐 50년대부터 70년대까지 국전(國展)의 한 지류를 형성하였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근래에 미술평론가들이 '한국근대유화베스트10'에 1위로 선정한 <경주의 산곡에서>(1935)를 비롯하여 <가을 어느날>(1932), <복숭아>(1939), <해당화>(1944) 등 불후의 명작들과 근대화단에서 가장 뛰어난 수채화가로서의 진면목을 보여 주는 <카이유>(1932), <아리랑 고개>(1934), <여름 실내에서>(1934) 등 정물화, 풍경화 외에도 작가 자신을 그린 몇 점의 <자화상>과 아내와 딸, 여학생 등 주변 사람들을 소재로 하여 모델의 특징을 예리하게 포착한 개성 넘치는 인물 초상화 등 다양한 장르와 기법을 보여주는 그의 작품이 일반인에게 널리 소개되고 전시되는 기회가 좀더 자주 생겨 그에 대한 지속적이고 객관적인 평가가 이루질 것을 기대해 본다. "


이인성은 1912년 대구 출생이며 1950년 6.25때 치안 요원에 의헤 불의의 총기 사고로 39살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이번 전시는 그의 활동 전성기인 1930년대 초부터 1940년대 말까지의 20년을 조명하고 고향이 지닌 근원적

맥락을 읽을수 있는 주요 작품 풍경화,인물화,정물화를 대구 미술관 소장 작품및 개인 소장자들의 협조를

얻어 엄선 전시하였다 ( 전시 작품 20점 )


이인성의 화구

낚시 ( 1932년 추정 수묵담채)

이인성은 취미가 낚시였다

36CM*7,5Cm의 작은 그림이다.자세히 봐야 알수 있는데 사진으론 잘 안 보여 아쉽다

첨성대 ( 1934 수묵담채 24*36Cm )

경주는 이인성이 애정하는 제2의 고향이다

경주 풍경 ( 1938년 종이에 수채 25.5*48.5Cm)

다채로운 색감이 인상적인 작품이다

어린이 (1940년대 종이에 수채 41*23 )

어린이를 좋아하여 크로키의 대상으로 자주 선택하였다

빨간 옷을 입은 소녀 9 1940년대 캔버스에 유채 44.7*26.5 )

교과서에 실려 있는 그림이다.

붉은 배경의 자화상 ( 1940년 나무에 유채 18*10.5Cm )

이인성은 1940년대 후반에 자화상을 많이 남겼다

침실의 소녀 ( 1930년대 캔버스에 유채 80*44 )

이인성이 가장 행복한 생활을 보내던 시기의 작품 1930년대 후반으로 추정된다

그림은 도쿄에서 유학중 만나 결혼한 김재명 남산병원 원장의 딸 김옥순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

애향의 어린 모습일걸로 생각된다

노란옷을 입은 여인 ( 1934 종이에 수채 75*60 )

이인성의 아내 김옥순 ( 1916~1942 )이다

1935년에 결혼식을 올렸다. 이 그림은 결혼식 올리기전 1934년일걸로 생각된다

정물 ( 1938년 나무에 유채 24*33.3 )

정물화의 기본인 기물,과일,천 세가지 대상만을 사용하여 완성한 그림이다

정물 ( 1930년대 중반 수묵담채 23*43 )

왼쪽에 인성이라 쓰고 낙관을 찍어 그림에 균형감을 준것이 특이하다

카이유 ( 1932 종이에 수채 72.5*53.5 )

일본으로 유학간지 1년만에 그린 그림. 일본에 있다  1999년 국내로 들어와 국립현재미술관에서 소장중

정물 ( 1944년 캔버스에 유채 45*53 )

이인성은 1942년부터 정물화 연구에 몰입하였다

붉은 장미 ( 1940년대 초반 캔버스에 유채 45.5*38 )

2018년 대구미술관이 소장한후 처음 전시된 작품

장미 ( 1940 나무에 유채 45.3*37.3 )

자세히 보면 장미의 모습이 각양각색이다

풍경 ( 1942 종이에 수채 25*56.5 )

수채화를 유화 못지 않게묵직하게 그려냈다

계산동 성당 ( 1930년대 종이에 수채 34.5*44 )

이인성이 일본에서 귀국하여 그린것으로 추정.

가운데는 감나무 ..지금도 존재하고 있다

온일 ( 1930년대 중반 캔버스에 수채 72*90 )

따뜻한 어느날 수목으로 가득찬 정원 세 여인이 등장한다

여름 실내에서 ( 1934년 캔버스에 수채 71*89.5 )

고무 수채 색채가 선명하다

사과나무 ( 1942년 캔버스에 유채 91*116.6 )

장인이 소유하는 안동 과수원을 모티브로 한 작품이 많다

현재 이인성 작품중 보존이 최고인 작품

사과 52개 개별적인 정물화라 해도 과언아 아니다

대구 명덕초등학교 소장 대구미술관에 기탁

팔공산 ( 1930년대 중반 나무에 유채 24.3*33.5 )

이인성은 팔공산도 좋아했다

전시를 한바퀴 돌아 본뒤 도슨트 설명이 있어 다시 들었다

확실히 도슨트 설명을 들으니 이해가 쉽다

그는 한국의 고흐,고갱이라 불리울만 하다

3번의 결혼, 그리고 불행한 죽음

앞으로 기억될 천재 화가다..


☞ 1월 5일 아내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