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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空空)의 시선

인상 깊은곳

10.26 그리고 최규하 대통령-국립 대전 현충원 국가원수 묘역

空空(공공) 2020. 10. 26. 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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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0월 26일은 많은 사람들의 운명을 바꾸어 놓은 날이다


역사는 하룻밤에 이루어진다는 말과 같이 궁정동에서의 하룻밤의 짧은 시간이 이 나라 역사에 있어 

대 변곡점이 시작된 서막이었다.


그 혼란스럽던 정국에서 당시의 지위를 이용해 야심을 품었더라면  우리 역사가 어떻게 되었을지도 모르는데 

묵묵히 자신의 일만 수행하셨던 분이 있다.

바로 대한민국의 4번째인 제 10대 대통령인 최규하 대통령이다

그 때문에 후일 무책임 했다는 비난도 들어야만 했었기도 하다


정치를 몰랐던 그였기에 당시 헌법에 의해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에 의해 단독 입후보 하여 96.7%의 득표율로 

10대 대통령에 당선될수 있었고 종국에는 허수아비나 다름없는 대통령이 되었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만일 그때 재야 정치인들의 요구대로 헌법을 개정, 선거를 했더라면 대한민국의 역사는 

많이 바뀌어 있을지도 모른다.


최규하 대통령의 한가지 아쉬운 점은 12.12나 5.18에 대한 증언 진술을 거부했다는 것이다

그는 진술 거부에 대해 '그 사유를 밝히지 않는 것은 전직 대통령이 증언에 응하는 악례를 남기지 않는 것'이라며 

진술 거부의 이유를 피력하였는데 대통령 하야 과정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영원히 풀지 못하는 숙제가 되었다


대한민국의 4번째인 제 10대 대통령인 최규하 대통령의 묘소를 지난 10월 부모님 계신곳 성묘하러 간길에 

찾아 보았다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은 모두 12명이다 ( 현 대통령 포함,권한 대행 제외 )

그 중 고인이 되신분은 7분인데 4분은 국립현충원에 2분은 사설 묘지 그리고 최규하 대통령이 대전 현충원에 

안장 되어 있다

(출처 : 대통령 기록관)


최규하 대통령은 1919년 강원도 원주시의 생가에서 태어나 원주보통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원주보통학교를 졸업할 때(1932년)까지 할아버지에게 한학을 배운 그는 1937년 경성제일고보(경기고 전신) 

졸업 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공무원으로 시작해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대통령이 되기까지, 최규하 대통령은 30년이 넘는 공직생활 동안 

단 한 번도 어긋남이 없이 ‘청렴’과 ‘헌신부난(獻身赴難, 몸을 던져 어려움을 헤쳐나간다)’이라는 

자신의 원칙을 지키며 살았다.

당시에는 드물게 178cm 장신의 큰 체격이었던 최 대통령의 평소 식사는 ‘콩자반, 꽁치, 김치, 국수’ 정도에 

불과했다


최 대통령은 그의 상차림처럼 권력욕이 없었지만, 일을 시작하면 끝날 때까지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이 있었다. 

외무부 장관, 국무총리 등을 역임하던 때에도 “지구는 돌고 우리가 쉬고 있는 동안 다른 나라는 일 한다.“ 며 

솔선수범했던 그는 온화한 성격이었고 업무에서는 공평무사했으며 일을 처리할 때는 철저했다.


2006년 최규하 대통령 서거 후, 그의 사저가 1973년부터 줄곧 연탄을 사용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총리 시절 강원도 장성광업소에 고생하는 광부들을 보고 평생 연탄을 때겠다고 한 약속을 지킨 것이다. 

최규하 대통령은 어려운 사람들에겐 그렇게 뜨거운 대통령이었다.   ( 대통령 기록관에서 인용 )


군지휘관 최규하 대통령께 신고후다과참석-대통령 기록관






대전 현충원 다닌지 10년만에 처음 찾았다.

조용한 우리만의 참배였다

( 10월 18일 찾았는데 10월 22일이 14주기가 되는 양력 기일이었다 )

☞ 10월 18일 아내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