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열 왕릉과 무열 왕릉비를 보았으면 의당 뒷편에 있는 고분도 보아야 한다
엄연히 별도 사적으로 관리 되고 있는곳이다
▶사적 제142호 경주 서악동 고분군 (慶州 西岳洞 古墳群)
경주 서악동 무열왕릉 바로 뒷편의 구릉에 분포하는 4개의 대형 무덤을 가리킨다.
이곳의 무덤들은 경주분지의 대형 무덤과 비슷한 형태로 둥글게 흙을 쌓아올린 원형 봉토무덤이다.
아직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내부구조 시설은 확실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봉분이 거대한 점, 자연돌을
이용해 둘레돌을 두른 점 및 무열왕릉보다 높은 곳에 있는 점으로 보아 안에는 나무로 된 네모난 방을
만들고 그 위와 주변에 돌무더기를 쌓은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 형식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들 무덤이 분포한 지형은 선도산에서 서남으로 뻗은 능선상에 있고, 뒷산과 동서의 계곡 건너에 있는
능선 등을 종합해 볼 때, 풍수지리사상의 영향하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무덤의 주인에 대해 첫 번째 무덤은 법흥왕릉, 두 번째 무덤은 진흥왕릉, 세 번째 무덤은 진지왕릉,
네 번째 무덤은 문흥대왕릉 등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 포털에서 인용 )
무열왕릉과 같은 공간에 있다
산쪽으로 조금만 걸어 들어가면 된다
이길로 해서 한바퀴 돌아 나왔다
崔珉熙(진흥문화재연구원)
신라사학회 신라사학보 제40호에 의하면
신라중고기를 대표하는 왕릉군인 이곳이 조선말 김정희에 의해 왕릉으로 비정되기 시작하였다.
이후 여러 학자들이 나름 근거를 제시하면서 왕릉 주인을 비정하였다.
그러나 기록에 충실한 듯하면서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온 것이 사실이다. 기록을 구체적으로 해석 이용하고,
현장의 유적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새롭게 왕릉 주인을 비정하고자 하였다.
여기에는 신라왕릉 가운데 가장 확실한 태종무열왕릉에서 출발하여, 애공사와 영경사의 위치를 추정하는데서
시작되었다. 애공사와 영경사는 여러 학자들의 연구된 자료를 현장에 적용하여 확인하였다.
애공사와 영경사를 기준으로 역사서에 기록된 왕릉의 위치를 이용하여 비정하였다.
결과적으로 1호분은 법흥왕릉, 2호분은 진흥왕릉, 4호분은 진지왕릉이 확실하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3호분은 솔직하고 정확하게 말하면 주인을 모른다고 해야 한다.
다만 추정해 본다면 진흥왕비 사도부인일 가능성이 가장 많다. 왕비로서 장례에 관해 기록이 남겨진 유일한
존재이고, 진흥왕릉이 바로 옆에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능의 주인이 누구인지가 명확하지는 않은것 같다
아이들이 있어 멀리서 잡아 보았다
아직 발굴을 한적이 없다니 발굴을 해서 명확한 주인을 가려 내는게 좋을지 그냥 이대로 두는게
좋을지는 모르겠지만 훼손하지 않고 이대로의 모습도 좋은것 같다
이어서 무열왕릉 길 건너편에 있는 2기의 묘 .
김인문 묘와 김양묘 를 보았다
▶ 경상북도 기념물 제32호 김인문묘 (金仁問墓)
경주시 서악동에 있는 문무대왕의 친동생 김인문(629∼694)의 묘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책을 많이 읽었고 특히 글씨를 잘써 태종 무열왕의 비문을 썼고 활쏘기와
말타기에도 능하였다. 또한 넓은 식견과 훌륭한 재주와 솜씨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20대에 당나라에 들어가 좌령군위장군이 되었고 신라에 들어와서는 군주가 되어 장산성을 쌓는데
감독을 맡았다.
외교술에 능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킬 때 당나라에게 신라측 협조사항을 받아내는데 큰 공을 세워
신라의 삼국통일에 큰 역할을 하였다. 당나라에서 관직을 지내다가 효소왕 3년(694)에 죽었다.
당 고종은 그의 시신을 호송하여 신라로 보냈으며 효소왕은 그에게 태대각간(太大角干)의 벼슬을 내렸고
서악에서 장례를 치르게 했다. 특별한 시설이 없이 높이 6.5m의 흙으로 높이 쌓아 올린 원형봉토분이다.
▶경상북도 기념물 제33호 김양묘 (金陽墓)
경주시 서악동에 있는 신라의 왕족 김양(808∼857)의 묘이다.
태종 무열왕의 9대손으로 흥덕왕 3년(828)에 고성 태수가 되었고 무주 도독을 지냈다.
가는 곳마다 많은 공적을 남겨 명성이 높았다고 한다.
830년에 장보고와 함께 민애왕을 죽이고 우징(신무왕)을 왕으로 추대하여 모셨으며 신무왕이
일찍 죽자 뒤를 이은 문성왕을 다시 모셨다.
문성왕 19년(857)에 나이 50세로 죽자 그에게 대각간(大角干)의 벼슬을
내리고 태종 무열왕의 릉(陵) 서열에 따라 그 곳에 같이 모셨다.
특별한 시설 없는 비교적 큰 무덤이며 흙으로 높게 쌓아 올린 원형봉토분이다.
김인문 묘
김양 묘
김인문은 중국에서 사망하였으므로 그의 흔적이 중국에 있을것이다
절강성 온주에 신라산및 신라 태자관이란 도교 사당이 있는걸로 보아 명확하지는 않지만 김인문의
흔적이 아닐까도 추측해 본다 ( 2012년 6월 26일 동아 기사 참고 )
☞ 5월 1일 혼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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