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空空)의 시선

인상 깊은곳/산_사찰

팔공산 수도사 그리고 보물 노사나불 괘불탱

空空(공공) 2018. 8. 26.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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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 치산계곡에서 깨끗하고 조용하게 물놀이를 즐기려면 수도사를 지나

폭포쪽으로 올라가면 좋다

올라가는 길 오른편에 위치한 수도사,,그 어느 사찰 못지 않게 주위 자연 환경이 빼어 나다

 

오고 가며 한번은 들러볼만한 사찰이다

대한불교 조계종 10교구 은해사 말사이다

 

* 창건 배경및 역사

 수도사는 647년(진덕왕 1) 자장(慈藏, 590∼658)과 원효(元曉, 617∼686) 두 스님이 함께 금당사(金堂寺)라는 이름으로창건했다고 전한다. 그 뒤의 연혁은 잘 알 수 없고, 고려시대에 들어와 1206년(희종 2) 보희(普熙) 국사가 중창하였는데 보희 국사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그리고 조선시대에 들어와서의 역사도 문헌이 전하는 바가 별로 없다. 1805년(순조 5)에 징월 정훈(澄月正訓, ?∼?) 스님이 중창하였다. 정훈 스님은 동화사를 중심으로 대구·경북 지역에서 주로 활동했던 고승이었다. 이어서 1899년(광무 3) 산령각을 지었다. 

그밖에 사찰에 전하는 사적기나 역사서는 아니지만, 조선시대 중기의 학자 정시한(丁時翰, 1625∼1707)이 전국의 명산대찰을 유람하며 지은 "산중일기(山中日記)"에 수도사가 나오므로 이 기록을 수도사 역사의 하나로 취급할 있다. "산중일기"에는 정시한이 1686년(숙종 12) 6월 24일 수도사의 응담(應湛) 스님을 염불암(念佛庵)에서 만났고, 또 8월 20일에 수도사 영자전(影子殿)에 가서 여러 날 묵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때 수도사에 승통(僧統) 응담(應談)을 비롯하여 당시 나이 83세의 처순(處淳), 그리고 옥륜(玉倫)·옥행(玉行)·탄흡(坦洽) 스님 등이 맞아주었다는 내용도 보인다. 또 정시한은 수도사 터에 대해 말하면서, 건좌손향(乾坐巽向), 곧 서북쪽에서 동남쪽을 바라보고 있는 방위로 비록 평평한 편은 아니지만 폭포 바로 머리 위에 있어서 이곳이 곧 정기가 모이는 곳으로 여기고 있다는 말도 하여 당시 수도사의 여러 정황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근대에는 1929년 윤경천(尹敬天) 스님이 신도 김용필(金龍弼)과 함께 원통전을 중수하였다. 최근에는 1979년 우희장(禹熙璋) 주지가 이용하(李容夏) 신도회장을 비롯한 여러 신도의 시주를 모아 해불당(海佛堂) 해회루 요사 등을 중수하였다. 그리고 1985년에 삼성각을 지었으며, 2000년 6월에 석조 약사여래 삼존불상을 봉안하였다.

                                                                       ( 대한민국 구석구석에서 인용 )

석조 약사여래 삼존불상

여긴 복주머니가 달려있다

흰 바디나물꽃

원통전

보물 제1271호 노사나불 괘불탱

화면 한가운데 노사나불입상이 장대하게 표현된 단독상인데, 연꽃 가지를 들었으며 7구의 화불(化佛)이 표현된 보관(寶冠)을 썼다. 원형 두광(頭光)주 01) 신광(身光)주 02)을 지닌 노사나불은 고개를 숙인 듯한 둥근 얼굴이 창백하다.
눈썹은 내려오고 눈은 올라간 근엄한 표정이다. 굵은 목 아래 삼도(三道)의 표현, 왼쪽보다 넓은 오른쪽 어깨, 커다란 손 등이 어색하지만 신체의 비례는 적절한 편이다. 등·어깨·머리 위로 퍼져있는 오색 광선과 신광의 하늘색과 보색 대비를 이루는 주황색 천의(天衣: 천인(天人)이나 선녀의 옷)는 주존불인 노사나불을 강조하고 있다. 두 어깨를 덮은 천의는 큼직한 편으로 묵직하며, 치마 자락의 구불구불한 옷주름 처리는 도식화되었다. 가슴 위로 치켜 입은 내의(內衣)의 국화문은 금니(金泥)로 화려하게 채워져 있다. 전체적으로 문양은 적게 표현되었는데, 오색 광선문 외에 광배와 배경은 여백으로 남겨두어 본존불을 강조하였다.
육중한 보관, 천의, 목걸이, 장신구가 달린 매듭 끈과 무릎 장식 등에서 문양과 장식이 억제된 것을 알 수 있다. 주홍색과 녹색이 주조색이며 하늘색과 분홍색이 돋보인다. 가볍고 부드러운 파스텔 톤의 색상이 노사나불의 흰 피부와 어울려 밝고 화사하다.
흔히 보관불로 등장하는 노사나불은 두 손을 어깨 위치에 둔 설법인의 손 모양이지만 연꽃을 든 경우도 있다. 석가불의 일대기인 팔상도의 녹원전법상(鹿苑轉法相)에서 노사나불로 출현한 석가불을 발견할 수 있다. 녹원전법상은 성도(成道)를 이룬 석가불이 노사나불로 화(化)하여 화엄경을 설법하는 장면을 나타낸 것이다. 전라남도 천은사 팔상도(1715년, 소재 불명)의 녹원전법상(鹿苑轉法相) 가운데 석가불이 연꽃을 든 노사나불좌상으로 화현한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사 대웅전 삼신불회도(18세기) 중 노사나불좌상도 연꽃을 들었다. 따라서 17세기의 군도식 노사나불괘불탱의 노사나불이 설법인을 한 전형적인 도상과는 달리 18세기에 독존 형식이 대두되면서 연꽃을 든 노사나불이 조성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연꽃을 든 보관불은 화신 석가모니불, 미륵불로도 표현되기 때문에 존명(尊名)이 없다면 이들의 구별은 쉽지 않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시간적 여유가 있으면 보물 노사나불 괘불탱을 바라보며 차를 한잔 마실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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