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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空空)의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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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명재 ((慕明齋 ) - 조선에 귀화한 명나라 장수 두사충의 재실

空空(공공) 2019. 2. 28.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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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국립박물관을 가는길에 모명재를 한번 더 찾았다.

난 지난 2015년 7월 ( ☞ 대구 가볼만한곳 모명재 ) 한번 찾은적이 있지만 아내는 처음이라 한번 보여 주고 싶었다

 

모명재는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장수로서 우리나라에 원군으로 왔던 두사충(杜師忠)이 귀화한 후에 그 후손들이

1912년에 세운 재실로 그의 호인 '그리워할 모(慕)', '명나라 이름 명(明)'자를 써서 '명나라를 그리워한다'는 의미이다

 

두사충에 대해서는 다시 대구 수성구청의 누리집에서 옮겨 왔다

중국 명나라 두릉(杜陵) 사람, 두사충(杜師忠).

 
두사충은 시성(詩聖) 두보의 후손으로 1592년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군 이여송(李如松)과 함께 조선에 원군 온

수륙지획주사(水陸地劃主事)였다.

지세를 살펴 진지를 삼을 만한 좋은 터를 잡는 일이 그의 임무로 그는 명나라 최고의 풍수지리가였다

 

두사충은 정유재란 때는 두 아들과 함께 와서 공을 세웠는데 난이 평정된 뒤 귀화한 후 현재의 경상감영공원 일대에서

살다가 계산동으로 옮겼으나, 중국에 두고온 부인과 형제들이 생각나 최정산 밑으로 주거지를 다시 옮겨, 명나라를

생각한다는 뜻에서 동네이름을 대명동이라 하였다.

그리고 단을 쌓아 매월 초하루가 되면 관복을 입고 고국을 향해 절을 올렸다 한다.

자손들은 두사충의 유언에 따라 형제봉 기슭에다 그의 묘소를 마련했다

 

편액 만동문

만동문은 ‘백천유수 필지동(百川流水必之東)’라는 말에서 따온 것인데 모든 하천은 동쪽으로 흘러간다는 말로 ‘그 근본을 잊지 않겠다’는 뜻이다. 

모명재는 1966년 노후로 인하여 중수가 있었던 건물이지만 그 규모와 구조는 당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어 20세기 초,

대구지역 재실 건축양식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건축물이다. 재실은 네모반듯한 대지에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정면 4칸, 측면 3칸 규모에 좌우 1칸 온돌방, 중앙 대청 2칸, 전면 툇마루, ‘一’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다.

가구(架構, 목조건축 짜임새 전체를 일컫는 말)는 무고주(無高柱, 외부 기둥 외에 내부 기둥이 없는 것)

5량가(도리개수를 말함)의 견실한 구조로 지붕은 팔작지붕, 처마는 겹처마로 만들어졌다.

숭정유루(崇禎遺樓)’는 숭정이 남긴 누각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여기서 ‘숭정(崇禎)’은 명나라 마지막 황제를 말한다.

형봉재(兄峰齋)’는 두사충의 유언에 따라 ‘형제봉’에 묘를 썼기 때문에 붙여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락헌’은 하늘과 땅에 한 점 부끄럼이 없는 당당한 삶을 누리는 집이란 뜻이다

기둥에는 이순신의 시가 씌여 있다.

신도비 이순신 장군의 7대손인 삼도수군통제사 이인수가 지었다

명나라에서 가져온 청석으로 다듬었다는 문인상

팽나무

명정각은 두사충의 7대손인 두한필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조정에서 정려를 내린 것이

지난번과 다르게 앞쪽이 단장되어 있었다..

조선 사람이 될지언정 오랑캐 백성이 될 수는 없다며 귀화를 택한 두사충..

그는 명나라 최고의 풍수지리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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