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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空空)의 시선

인상 깊은곳

( 대구 가볼만한곳 ) 노변동사직단,사월동 지석묘,고산 서당

空空(공공) 2016. 10. 31. 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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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역사 드라마나 영화에서 신하들이 임금에게

"전하. 종묘 사직이 위태롭습니다" "종묘 사직을 지키시옵소서"라는 대사가 자주 나온다

 

종묘는 그 나라의 역대 제왕들과 왕후들의 신주를 모시고 제례를 봉행하는 유교 사당이다

우리 나라의 종묘는 종묘 사직을 버리고 도망간 선조때인 임진왜란때 소실되었다가 광해군때

다시 지어졌고 지금 종로구 훈정동 1번지에 위치해 있다

 

사직은  사(社)와 직(稷)을 합친 것인데, 사는 이 세상 만물을 생산해 주고 모든 만물을 실어 주는 토지의 신에게 감사하는 제사를 지내는 단(壇)이고, 직은 사람을 먹고 살게 해주는 곡식의 신에게 제사 지내는 단이다.

현재 서울 사직단을 비롯 6군데가 남아 있다

그 중의 한곳인 대구 노변동사직단(대구광역시 지정기념물 제 16호) 을 찾았다

바로 옆으로는 부산으로 가는 고속도로이고 월드컵경기장밑의  유니버시아드 도로변에 위치해 있어

일부러 찾아가지 않고는 찾아가기 어려울수도 있다

지금의 모습은 복원,정비한것이다

( 대구 노변동 사직단 )

 노변동 사직단 유적은 과거 경산현(慶傘懸)의 사직단이다. 발굴조사에 의해 밝혀진 노변동 사직단의 구조는 사직신을 모시는 제단시설, 제단을 보호하는 담장 등이 확인되었으며, 기초단의 아랫부분 규모는 장축 24m, 단축이 16m 정도이며 높이는 130 ~ 180㎝ 정도이다. 기초단 위에 유시설이라 불리는 담장을 쌓았으며 그 내부에 하나의 제단을 설치하였다. 도성의 사직단과 달리 지방의 사직단은 사단(社壇)과 직단(稷檀)을 합쳐서 하나의 단을 두었기 때문에 제단(祭壇)은 하나이다. 출입문 중 북쪽의 문이 폭 103㎝ 정도로 좁은 특성을 나타내고 있는데 이는 북쪽의 문이 북신문(北神門)이라 불리는 문헌기록과 같이 신을 위한 문으로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노변동 사직단은 발굴조사에 의해 확인된 바에 의하면 조선시대 전기에 조성한 후, 한차례의 보수와 개축을 하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현재 복원.정비된 사직단은 2차 조성분 원형대로 하부구조를 보존하였으며, 상부 구조물은 과거 문헌기록을 바탕으로 조선시대의 사직단 형태로 복원한 것이다.

                                                            ( 대구 수성구청 홈 페이지에서 인용)


사직단은 유니버시아드로를 닦으면서 발굴되었는데 그 당시 고분군도 같이 발굴되었다

 

이어 찾은곳은 사월동 지석묘다

아파트 단지내에 있어 찾아 가기가 어렵고도 쉬웠다 ( 근처 가서 물어 봤는데도 잘 모르시더라는..)

위치는 시지2차 사월보성타운내 위치한다..(아파트로 들어 가지 말고 입구 안내판을 따라 가면 된다)

( 사월동 지석묘: 대구광역시 기념물 제 9호 )

 지석묘는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고인돌이라고도 부른다. 이곳은 대덕산에서 발원하여 욱수동을 거쳐, 사월동에서 남천과 합류하는 신매천이 만든 부채꼴 지형의 아래쪽에 있다.현재 4기가 있고, 1기를 제외하고는 모두 굄돌(지석)을 구비하고 있는 기반식으로 암질은 혈암(頁岩)이다.옛날부터 칠성바위라 부르고 있어 원래는 7개였을 것으로 추측된다.이들 고인돌은 비록 무덤이지만 청동기시대부터 사월동에 사람이 살았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중요한 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다.

                                                        ( 대구 수청구청 사이트에서 인용)

 

지도만 보고 찾아 간곳..고산 서당이다

비가 부슬 부슬 내리기에 조금 조급해졌다

문은 역시 잠겨 있었다

( 고산 서당: 대구광역시 문화재 자료 제15호 )

 고산서당은 앞쪽으로 남천(南川)과 고산 들녘이 바라다 보이는 성동 서원골 야산자락에 있으며, 고산서당이 언제 세워졌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퇴계(退溪) 이황(1501~1570)과 우복(愚伏) 정경세(1563~1633)선생이 이곳에서 강(講)을 했다는 것으로 보아 1500년대에 이미 건립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뒤편에 퇴계와 우복 선생의 강학(講學)유허비(遺墟碑)와 아름드리 정자나 무가 있어 고산서당의 내력을 짐작할 수 있다.1690년(숙종 16)에는 서당 뒤편에 사당을 건립하여 퇴계 · 우복 두분의 위패를 모시면서 고산서원으로 개칭되었으나, 사당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강당은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때 훼철되었다가 1879년(고종 16) 유림에서 옛터에 강당만 다시 지어 고산서당이라 하였다.고산서당은 방형(方形) 토장(土檣)으로 둘려져 있고 건물구조는 납도리 위에 3량(樑)가구로 결조된 간결한 구조로 대량(大樑)은 만곡(灣曲)이 있는 목재와 막서까래를 사용하여 자연스러운 건물로 정면4칸, 측면2칸 규모로 가운데 2칸 마루를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이 있는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 대구시 수성구청 사이트에서 인용)

비가 오기도 했고  이 녀석이 하도 짖어서 뒷산에를 오르지 못했다.보호수가 있었는데..아쉽다

 

대구도 참 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