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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空空)의 시선

인상 깊은곳

전주 한옥마을-풍남문,전동 성당

空空(공공) 2016. 11. 2. 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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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가는길이 생각보다는 멀다

지금이 이럴진대 정말 예전은 영남에서 호남 다니기가 정말 힘들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가는길 진안 마이산 휴게소에 들렀다

멀리 보이는 마이산 모습이 보기 좋다

2013년 9월말에 다녀 왔으니 벌써 3년이 흘렀

세월이 유수같다는 말을 이럴때 쓰는 것이리라..

 

3시간여를 가서 도착한 전주 한옥마을

한옥마을로 들어가는길은 여러길이 있지만 우린 풍남문 앞에 내렸다

풍남문은 전주 4대문중 유일하게 남은문이다

고려 공양왕 원년인 서기 1388년 전라관찰사 최유경에 의해 창건된 풍남문은 조선의 수도인 한성부의 숭례문 (남대문)과 같은 형태의 특징을 보인다. 또한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황토현에서 대승을 거둔 동학농민군이 관군과의 치열한 격전장이기도 했다. 풍남문과 지척에 있는 전동성당은 풍남문의 성벽을 헐어 낸 돌로 성당의 주춧돌을 세웠다고 한다.옛 전주부성의 남쪽 문인 풍남문은 전주읍성의 동서남북 네 곳의 성문 가운데 유일하게 보존되고 있는 보물 제308호이다.

1338년 축성한 이후 1597년(선조 30년) 정유재란 (丁酉再亂)으로 성곽과 성문이 모두 파괴되어 1734년(영조 10년) 관찰사 조현명이 성곽을 중건하고 남문의 이름을 명견루(明見樓)라 하였다. 그러나 1767년(영조 43년)의 대화재로 불타 이듬해 관찰사 홍낙인이 재건하고 남문을 풍남문(豊南門)으로, 서문을 패서문(沛西門)이라 하였다

그 후 종각, 포루 등이 일부 헐리고 지면이 묻히는 등 원형이 훼손되었으나 1978년부터 3년간의 보수 공사로 옛 모습을 되찾았다. '풍남문'이란 이름은 중국을 통일한 한 고조 유방의 고향인 풍패(豊沛)에 빗대어 태조 이성계의 관향인 전주를 풍패향이라 부른 것에 기인한다. 전주부성 가운데 남쪽 성문을 풍패향 전주의 남문이란 뜻으로 풍남문이라 하였다.풍남문은 1층은 앞면 3칸, 옆면 3칸이며, 2층은 앞면 3칸, 옆면 1칸으로 문루의 1층에 앞뒤로 4개씩 세워진 높은 기둥이 그대로 위로 이어져 2층의 변두리기둥이 되도록 하였다. 이런 기둥 배치는 우리나라 문루 건축에서는 예가 많지 않아, 풍남문은 건축적인 가치도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 전주시 문화 관광 사이트에서 인용)

 

풍남문에서 큰 도로 (팔달로)를 건너 가면 바로 한옥마을이다

바로 입구에 전동성당이 있다

백남기 농민의 영원한 안식을 기원하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간날이 일요일이라 오전엔 신도들의 미사가 있 12시부터 입장이 가능하단다..

한옥마을 큰 길인 태조로를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전동 성당을 들어 갔다

한옥마을 초입에 서 있는 소박하고 아담한 모습의 전동성당. 전동성당은 1791년 신해박해 때 윤지충(바오로)이 모친상 때 교리를 좇아 신주를 불태우고 제사를 지내지 않자 당시 유림들의 극심한 비난을 받게 되었고 이에 윤지충과 관련된 권상연(야고보)이 참수형을 당한 한국 최초의 천주교 순교터이며, 호남의 모태 본당이 된 전교의 발상지이다.두 성인이 순교한지 1백년이 지난 1891년 봄, 순교터에 본당 터전을 마련해 전교를 시작했다. 초대 주임신부인 보두네 신부가 순교 1백주년을 기념해 1908년 건축을 시작, 서울 명동성당을 설계한 프와넬 신부의 설계로 1914년 완공됐다. 착공에서 성전봉헌까지 무려 23년이 걸린 것이다
일제 강점기였던 당시 통감부는 전주에 새 길을 내기 위해 풍남문 성벽을 헐었는데 보두네 신부가 그 성벽의 돌들을 가져다 성당 주춧돌로 사용했다고 한다. 성당 지하에는 당시 썼던 주춧돌이 성당을 탄탄히 떠받치고 있다. 공사는 중국인 벽돌공 백여명이 동원돼 전주성을 헐은 흙으로 벽돌을 구웠고, 석재는 전북 익산의 황등산의 화강석을 마차로 운반해 왔다. 목재는 치명자산에서 벌목해 사용했다고 한다.전동성당은 완전한 격식을 갖춘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동서양이 융합된 모습이어서 어머니의 품처럼 따스함을 느끼게 한다. 호남지방의 서양식 근대건축물 중 규모가 가장 크고 오래된 것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화강석을 기단으로 사용한 붉은 벽돌 건물로서, 내부는 둥근 천장으로 되어있고 중앙의 종탑을 중심으로 양쪽에 배치된 작은 종탑들은 조화로운 입체감과 건물의 상승감을 더해준다. 비잔틴 풍의 종머리는 건물 본체와 잘 어우러져 사진촬영 명소로 도 각광받고 있다.성당 앞에 세워진 하얀 그리스도 상은 성당의 아름다움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 '한국 최초 순교터' 라고 새긴 기념비는 이 곳 전주의 아픈 천주교의 역사를 품은 전동성당의 존재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농민 백남기님의 영원한 안식을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