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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空空)의 시선

인상 깊은곳/고택,고건축물

( 안동 여행 ) 항일 투쟁의 가일 마을 (병곡종택,수곡고택)..가곡지

空空(공공) 2017. 3. 15.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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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도청을 보고 오후 시간이

좀 남았다

가는길에 한군데쯤 더 들리면

딱 적당할것 같았다

가지고 있는 지도는 안동 시내지도라

네비게이션을 활용하기로 했다

근처 문화재를 찾았더니 가까운곳에

몇개의 고택이 나온다

위치 주소들이 비슷 비슷했다

망설이지 않고 출발..

 

마을 입구 어귀에 들어서니 아담한 저수지가 나온다. 가곡저수지라 되어 있다

특이하게 벤치 의자가 놓여 있다

그리고 보호수,회화나무다 그 위용이 실로 대단하다

마을을 떡하나 지켜 주는게 범상치 않다는걸 느낀다

그것도 한 그루가 아니고 3그루나 있

이 마을 이름이 가일 마을이고 종택,고택 여러채의 안내 팻말도 눈에 띄였다

 

돌아 와서 알게 된 사실인데 이 마을은 600여년을 내려오는 안동 권씨 복야공파 후손들의 터전

이며 6.10 만세 운동을 계획한 항일 투쟁 운동의 얼이 서려 있기도 한곳이며 사회주의 운동가를

숱하게 배출하기도 해 "안동의 모스크바"라고 불리기도 했다

 

늦은 오후 시간이라 그런지 한적하고 조용했다

 

마을을 지키고 있는듯한 보호수 2그루

가곡지

고택과 종택이 여러채 있다는걸 알려 주는 안내

병곡 종택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38호 

조선 전기 문신인 권주(1457∼1505)가 생전에 살던 집이다. 그는 성종 11년(1480) 문과에 급제하고 승정원주서를 거쳐 성종 20년(1489) 공조정랑으로 요동을 오갔으며 도승지, 경상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연산군 11년(1504) 갑자사화 때, 그가 성종 13년(1482) 승정원주서로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들고 갔다는 이유로 파직당하고 살해되었다. 그가 죽자 가족들이 예천으로 이주하여 이곳은 빈집으로 방치되었다. 그 뒤 18세기 중엽부터 후손들이 다시 들어와 살게 되었는데, 지금 있는 건물은 150여년 전에 다시 세운 것이다.
‘시습제(時習齊)’란 이름을 가진 이 집은 6칸 규모의 건물로 □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다. 
안채 북동쪽에는 사당이 있다.이 집은 도승지(都承旨) ·경상도(慶尙道) 관찰사(觀察使) 등을 역임(歷任)한 화산(花山) 권주(權株)(1457-1505) 공(公)의 옛집이다. 
화산(花山)이 연산군(燕山君)11년(年)(1505)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루(連累)되어 세상(世上)을 떠나자 가족(家族)이 예천(醴泉)으로 이주(移住)하여 빈 집으로 방치(放置)되었으나 18세기(世紀) 중엽(中葉)에 후손(後孫)들이 들어와 다시 살게 되었다고 전(傳)한다. 
지금의 건물(建物)은 약 150여년(余年) 전(前)에 건립(建立)된 것으로 시습재(時習齋)란 당호(堂號)를 쓰고 있는 6간(間) 대청의 큰 집이다. 
간소(簡素)한 구조(構造)를 하고 있는 포집이 많이 간략화(簡略化)된 익공(翼工)집으로서 대청(大廳)의 대량(大樑)을 받친 주두(柱頭)에는 초각(草刻)한 양봉(樑棒)을 끼워서 의장적(意匠的) 효과(效果)를 나타내었다.

                                         ( 안동 관광에서 인용)

수곡 고택

할아버지 권보의 덕을 기리기 위해 정조 16년(1792)에 권조가 지은 종가집이다. 50여 호 되는 작은 마을 북쪽에 야산을 배경으로 자리잡고 있다. 권보는 일생동안 검소하게 살았던 사람으로 본채의 사랑채 지붕을 화려한 팔작지붕이 아닌 맞배지붕으로 한 것도 그의 소박함을 기리기 위함이다.

남향한 터에 'ㄷ'자형 안채, '一'자형 사랑채와 중문간채, '一'자형 별당, '一'자형 대문간채가 있다. 행랑채의 오른쪽 칸에 있는 문을 들어서면 넓은 앞마당을 사이에 두고 사랑채와 안채가 튼 'ㅁ'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안채의 뒷쪽 높은 곳에는 1칸의 사당이 있다. 별당채는 집터의 서쪽으로 안채와 대문간채 사이에 있는 건물로 새로 지은 사랑채라 해서 '새사랑채' 또는 ‘일지재’라 하기도 한다. 이곳은 학문연구와 제자를 키우기 위해 만든 곳이다.

전반적으로 볼때, 안채와 사랑채, 중문간채와 별당채 그리고 대문간채가 두루 갖추어진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양반집이다.

권성백 고택 :중요민속문화재 202호

양반집의 면모를 두루 갖추고 있는 조선 후기의 기와집이다. 언제 지었는지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건축 양식으로 보아 19세기 후반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안채와 사랑채가 이어져 완벽한 'ㅁ'자형을 이루고 있다. 안방과 왼쪽에 위치한 부엌의 배치관계는 남부지방의 민가형을 따르고 있다. 부엌은 3칸통으로 길고 문을 북쪽과 서쪽에 두 곳 두고 있다. 안방과 건넌방 사이에는 큰 대청이 있고, 건넌방 오른쪽으로 골방과 마루방이 있으며 그 아래로 모방·부엌·고방으로 이어져 사랑채로 연결되고 있다. 사랑채와 중문간채는 '一'자로 이어져, 가운데는 중문간이며 오른쪽은 사랑채·왼쪽은 문간채가 된다.

사랑채는 방과 대청으로 이루어졌으며 사랑마당 앞으로 길게 툇마루를 두었다. 중문의 왼쪽으로는 마굿간과 작은 사랑방·마루방 그리고 위로 꺾이면서 창고방이 부엌과 연결되어 있다. 사랑마당 앞쪽에는 방과 대문·마구간·헛간으로 구성된 一자형 대문간채가 있으나, 지금은 그 오른쪽에 새로 낸 대문을 이용하고 있다.

이 집에서 특히 주목되는 구조는 안방에서 부엌·광까지 이어지는 다락과, 대청 건너 상방과 골방 천장으로 이어지는 대형다락이다. 또한 안대청에 물건을 얹기 위하여 설치한 시렁도 다양하고 충실하게 꾸며져 있다. 전체적으로 규모가 크고 설비가 합리적이며 건축부재도 튼튼하고 충실하여 장중한 멋을 풍기는 조선 후기 주택의 좋은 예이다.

지정 당시 명칭은 '안동권태응가옥(安東權泰應家屋)'이었으나, 현 소유자의 증조부인 권병우가 입촌한 이래 그 아들 권중은(字:성백)이 구입한 가옥으로 자(字)를 따라 ‘안동 권성백 고택’으로 지정명칭을 변경(2007.1.29)하였다.

시간이 없어 하회마을,병산 서원은 가지 못했지만 가는길 초입에 있어 가기전

들러 보거나 경북 도청을 왔다가 보고 가면 좋을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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