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카오톡 채널 추가 버튼
공공(空空)의 시선

인상 깊은곳

(영덕)최초의 평민 의병장 태백산 호랑이 신돌석장군 유적지및 생가지

空空(공공) 2016. 8. 15. 05:30
반응형

영덕에 오면 꼭 들러 봐야겠다고 생각한곳이다

얼마나 멋진 별명인가? 태백산 호랑이.. 신돌석 장군

영화 대호의 호랑이처럼 일본놈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분이시다

 

( 신돌석 장군 )

 본관은 평산(平山), 자(字)는 순경(蕣卿)이고, 호(號)는 장산(壯山) 본명은 태호(泰鎬)이다.

이명(異名)은 돌석(乭石), 태홍(泰洪), 태을(泰乙), 대호(大浩)이며, 태백산호랑이라는 별명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1878년(고종 5년) 11월 3일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당시는 영해군

남면 복평리)에서 출생하여 퇴계(退係)의 방계인 육이당(六怡堂)이중립(李中立)에게

학문을 배웠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으로 전국에서 의병이 봉기하자

10여명의 동지를 규합하여 영해 의병진을 창군, 활약하다 1896년 고종황제의 명으로 해산했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일제에 의해 강제체결되어, 전국에서 의병이 봉기하자

1906년 3월 장군도 영릉의병진(暎陵義兵陳)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다시 창군하니 각처에서

모여든 동지가 300명이 넘었다 한다. 그 때 장군의 나이 29세였다.

장군은 최고 3000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경상남북도, 강원도, 충청도에 걸친 넓은 지역에서

항쟁한 의병장이기도 했으나, 일월산, 백암산, 대둔산 등지에 요새를 두고

소수정예로 적을 섬멸하는 게릴라전에도 능했다. 

 

신돌석 장군 유적지

신돌석장군에 대한 각종 자료들을 종합적으로 수집, 보전, 전시하여 장군의 넋을 기리고 항일정신을 되새겨보는 역사교육의 전당으로, 1999년 11월 18일 개관하게 되었다. 이 유적지에는 충의사, 동재, 서재, 외삼문, 내삼문, 기념관, 관리사무소, 주차장, 화장실 등의 주요시설이 있다. 

신돌석 장군의 한시

누에 오른 나그네 갈길을 잊은 채

단군의 옛터가 쇠퇴함을 한탄하네

남아 스물 일곱 이룬것이 무엇인가

추풍에 의지하니 감개만 솟는구나

생가지는 유적지에서 조금 떨어져 있다

 1940년에는 일본군이 독립의지를 꺾는다는 핑계로 불을 질러 태워버린 것을, 1942년에 기와로 복원했다. 그 후 1995년 8월 19일에 생가지 정비를 하면서 원래의 형태로 복원했다고 한다. 집은 동편에 부엌을 두고 방 한 칸과 대청, 그리고 건넌방을 두었다.

집은 단출하며 부엌만 앞으로 돌출을 시켰고, 방과 마루는 앞으로 처마를 빼고 뒤로 물려서 비가 들이치지 않도록 하였다. 방과 방 사이에 있는 대청에는 마주 보고 문을 내어 통할 수 있도록 하였다. 장독은 부엌 뒤편에 놓았으며, 앞마당에 돌우물이 있다    ( 하주성의 전통 가옥 엿보기에서)

장군은 약관 30세에 살해당했다. 신돌석장군이 죽은 것은 왜군들의 치졸한 방법 때문이었다고 한다. 총을 쏘아도 죽지를 않는다고 전해지자, 왜병은 신돌석을 잡아오는 자에게는 후한 상을 내리겠다고 하였다. 그런 왜병의 속임수에 넘어간 김상렬이 형제인 김상태, 김상호와 함께 집에 찾아 온 신돌석장군에게 독주를 먹인 후 도끼로 살해를 했다고 한다. 이 삼형제는 신돌석장군의 머리를 잘라 왜병에게 가져갔으나, 산채로 잡아오지 않았다고 하여 상을 주지 않았다고 한다.

마당에 풀 한포기가 외로이 피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