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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空空)의 시선

인상 깊은곳

(대전 여행) 소제동 벽화,장승,송자고택

空空(공공) 2023. 5. 21. 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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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제동 철도 관사촌 부근에는 대동천을 중심으로 벽화가 그려져 있다 

다양한 벽화 그림이 가는 걸음걸음을 천천히 걷게 만든다

 

대동천을 따라 벽화가 그려져 있다

실물일까? 인형일까?




관사촌과 천 건너편을 건너게 해주는 다리가 나오는데 바로 철갑교이다. 

1971년 지어진 다리로 교량길이가 47.5m이며 교량 폭은 7.3m이다. 

상부형식은 RC슬래브교이며, 하부 형식은 T형 교각식으로 지어져 있다.

이 철갑교 근처에는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하거나 놓치는 문화유적이 하나 남아있다. 

철갑교의 외곽 바로 두 개의 돌 장승이 보인다. 

이 장승의 유래는 독특하게도 소제동에 터를 잡고 살았던 우암 송시열과 관련되어 있다. 

때는 1658년 당시 조선의 임금이었던 효종의 부름을 받은 송시열이 다시 출사 하여 

소제동을 떠날 때였다. 

말을 타고 가고 있었는데 마을 정면에 보이는 보문산을 바라보고 이런 말을 남겼다.

‘산세가 벌거벗고 누워있는 여자의 모양이니 흉한 것을 없애고 마을의 잦은 질병과 재앙을 

막기 위해 장승을 세웠으면 좋겠다.’



송시열의 위의 말을 들은 동네 사람들이 흉한 것을 없애고 마을의 질병과 재앙을 막기 위해

 장승을 세우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원래 장승의 위치는 대동사거리에서 성남동쪽으로 이어져 있는 도로 중간에 세워져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도로공사로 인하여 100m 정도 자리를 이동하여 지금의 위치에 이른다. 

현재도 소제동에서는 노인회를 주축으로 매년 정월 대보름 전날 밤(14일 저녁) 동의 안녕과 

동민의 복을 기리는 거리제를 지낸다고 한다.

장승은 남장승과 여장승으로 구성되어 있다. 

두 장승은 선돌형 장승으로 남장승의 크기가 110cm이다. 

직사각형의 반듯한 돌의 전면에 검은색으로 천하대장군이라고 적혀있다. 

여장승도 남장승과 비슷하게 사각형의 비슷한 선돌이지만 각 모서리가 깎여있다. 

장승 옆에 세워져 있는 표지판에 의하면 현재 크기는 80cm 정도이지만, 

본래 155cm의 크기였다고 하며 위치를 옮기면서 윗부분이 파손되었다고 전해진다. 

정면에 지하여장군이라 쓰여있다. 

장승의 앞에는 시멘트 제단을 놓고 큰 못 다섯 개를 거꾸로 박아 놓았는데 이는 제사를 지낼 때 

촛불을 꽂아 놓는 동시에 잡귀의 출입을 막기 위한 것이라고 전해졌으나 소제동 장승을 

옮기면서 제단이 사라지고 지금의 모습처럼 화단처럼 주위를 돌로 둘러놓았다.

                              -대전도시재생지원센터 웹진에서 인용


송자고택  ( 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우암 송시열(1607∼1689)이 조선 효종 4년(1653)에 세운 집이다.

송시열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학자로 55세인 현종 7년(1661)까지 이 집에 살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담장도 없이 ㄷ자형 건물 한 채만 남아 있는데 가운데 3칸 중 왼쪽 2칸에 

대청마루를 조성하고 나머지 1칸에는 건넌방을 꾸몄다.

 대청마루 왼쪽으로는 안방과 윗방, 부엌을 들이고 건넌방 오른쪽으로는 방 2개와 부엌을 들였다. 

지붕 가운데 부분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고, 

양 옆의 건물은 옆면의 지붕선이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다.

지은 시기가 오래되었고 살림집으로 사용해오던 터라 보존 상태가 좋지 않은 편이지만, 

대부분 양옥집으로 구성된 주변의 경관과는 달리 예스러움을 간직하고 있는 집이다.

 

송자고택은 관리가 전혀 안 되어 있어 아쉬웠고 의아했다

말 그대로 폐가였다

☞ 2월 26일 아내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