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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空空)의 시선

버킷 실천하기/국보 탐방

버킷 실천하기-국보 탐방 28호 경주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 29호 성덕대왕 신종

空空(공공) 2017. 8. 22. 0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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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국보 총 329개중에

경주지역에 있는 국보는 모두 29개이다

 

그중에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는것은

11개이다

박물관의 국보나 보물은 순회 전시하는

경우가 많아 거기에 소재하고 있어도

볼수없는 경우가 간혹 있기는 하다

또 몰라서 넘어 가는 경우도 있다

 

경주박물관에 들어 가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게 국보 29호인 성덕 대왕 신종이다

어릴때 에밀레종으로 알고 있던 종이다

( 성덕대왕신종 ) 국보 제29호 62년 12월20일 지정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가장 큰 종으로 높이 3.66m, 입지름 2.27m, 두께 11∼25㎝이며, 무게는 1997년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정밀측정한 결과 18.9톤으로 확인되었다.

신라 경덕왕이 아버지인 성덕왕의 공덕을 널리 알리기 위해 종을 만들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뒤를 이어 혜공왕이 771년에 완성하여 성덕대왕신종이라고 불렀다. 이 종은 처음에 봉덕사에 달았다고 해서 봉덕사종이라고도 하며, 아기를 시주하여 넣었다는 설화로 인해 에밀레종이라고도 불리운다. 

종의 맨 위에는 소리의 울림을 도와주는 음통(音筒)이 있는데, 이것은 우리나라 동종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독특한 구조이다. 종을 매다는 고리 역할을 하는 용뉴는 용머리 모양으로 조각되어 있다. 종 몸체에는 상하에 넓은 띠를 둘러 그 안에 꽃무늬를 새겨 넣었고, 종의 어깨 밑으로는 4곳에 연꽃 모양으로 돌출된 9개의 연꽃봉우리를 사각형의 연곽(蓮廓)이 둘러싸고 있다. 유곽 아래로 2쌍의 비천상이 있고, 그 사이에는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가 연꽃 모양으로 마련되어 있으며, 몸체 앞,뒷면 두곳에는 종에 대한 내력이 새겨져 있다. 특히 종 입구 부분이 꽃모양으로 굴곡진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어 이 종의 특징이 되고있다.

통일신라 예술이 각 분야에 걸쳐 전성기를 이룰 때 만들어진 종으로 화려한 문양과 조각수법은 시대를 대표할 만하다. 또한, 몸통에 남아있는 1,000여자의 명문은 문장뿐 아니라 당시의 종교와 사상을 살펴 볼 수 있는 귀중한 금석문 자료로 평가된다.   ( 문화재청 누리집에서 가져 옴)

안전한 보존을 위해 2004년 12월 마지막 타종을 한 이후로 더 이상 타종을 않는다

시간 단위로 녹음된 종소리는 들을수 있다

성덕대왕신종지명이란 글자가 보인다

성덕대왕 신종에는 두군데에 글이 새겨져 있다

한면에는 성덕대왕 신종을 만들게 되기까지의 기록인 산문이 있고 반대쪽에는 네글자씩

50줄로 된 운문과 글을 짓고 쓴 사람, 종을 만든 사람이 새겨져 있다

현존하는 한국에서 가장 큰종으로 미술적 가치를 지닌 최고의 걸작품이다

 

본관인 신라역사관 뒷편에 있는 신라미술관의 불교미술실에 가면  국보 28호인 경주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이 있다

( 경주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 ) 국보 제28호 1962년 12월 20일 지정

 경주시 북쪽 소금강산의 백률사에 있던 것을 1930년에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 놓은 것이며, 전체 높이 1.77m의 서 있는 불상으로 모든 중생의 질병을 고쳐준다는 약사불을 형상화한 것이다.

머리는 신체에 비해 크지 않은 편이며, 둥근 얼굴·긴 눈썹·가는 눈·오똑한 코·작은 입 등에서는 우아한 인상을 풍기고 있지만, 8세기 중엽의 이상적인 부처의 얼굴에 비해 긴장과 탄력이 줄어든 모습이다. 커다란 체구에 비해 어깨는 약간 빈약하게 처리된 느낌이지만 어깨의 굴곡은 신체에 밀착된 옷을 통해 잘 드러나고 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입은 옷은 두 팔에 걸쳐 흘러내리고 있으며 앞가슴에는 치마의 매듭이 보인다. 앞면에는 U자형의 주름을 연속적인 선으로 그리고 있는데 조금은 도식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신체는 아래로 내려갈수록 중후해지며 옷자락들도 무거워 보이는데, 이것은 상체를 뒤로 젖힘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솟아오른 단전과 더불어 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두 손은 없어졌으나 손목의 위치와 방향으로 보아 오른손은 위로 들어 손바닥을 보이고, 왼손에는 약그릇이나 구슬을 들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소 평면적인 느낌을 주지만 신체의 적절한 비례와 조형기법이 우수하여 경주 불국사 금동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26호), 경주 불국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국보 제27호)과 함께 통일신라시대의 3대 금동불상으로 불린다.               ( 문화재청 누리집에서 가져 옴)

소유자는 백률사이다

 

 

찬란한 천년 신라의 역사를 느낄수 있었고 그때의 불교 문화가 지금껏 내려 온다는 사실을

한번에 알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