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空空)의 시선

인상 깊은곳/산_사찰

( 군위 ) 법주사.왕맷돌

空空(공공) 2016. 8. 24.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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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주사 그러면 우리가 흔히 알고 있기로는 속리산 법주사다

그러나 경북 군위에도 신라 시대부터 이어 내려져온 법주사가 있다

특히 여기는 우리 나라에서 가장 큰 "왕맷돌"이 있다기에 찾아 나섰다

 

사찰 앞에 주차를 하는데 차가 한대도 없다

의아하면서 사찰로 올라 가는데 날파리,초파리들이 정말 정신없이 달려 든다

날이 더워 흐르는 땀 냄새에 달려 든것이리라

지난번 칠곡 녹봉정사지를 갔을때도 그러더만..이제 여름에 산을 오를때는 해충퇴치약을 바르던지

뿌리던지 해야 되겠다

 

사찰로 들어가는길에 비구니 스님께서 석불에 예를 드리고 계셨다

사찰을 들러 보고 내려 오는중에 예불을 마치신것 같아 여쭤봤더니 고려시대 마애불이라고

이야기 하시고 문화재로 추진 작업중이시라신다

감사하게도 점심 공양을 하고 가라는 말씀도 하셨다

 

자동차가 몇대 사찰 앞에 주차 되어 있는것이 보인다..그럼 그렇지.

보기와는 다르게 규모가 대단하다..새로이 법당을 신축하고 보수한것이 여늬 대형 사찰 못지 않다

은해사의 말사로 비구니 스님들의 수행도량이다

속리산 법주사가 아니라 청화산 법주사

이 길을 잠시 걸어 올라가는데 땀냄새에 달려드는 날(초)파리땜에 헤엄치며 갔다

마애불에서 예불 드리는 비구니 스님

왕맷돌을 모신곳

법주사 왕맷돌 ( 민속자료 112호)

  법주사에 보관된 이 맷돌은 곡식을 가는 데 쓰이는 마석(磨石)이다. 법주사는 신라시대에 창건된 고찰로서 그 규모가 대단히 컸던 것으로 전해지나 화재로 소실되어 약 300년 전에 소규모로 재건되었다고 한다. 맷돌이 법주사의 것이었다면 사찰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이 맷돌은 현재의 법주사에서 200m가량 남쪽 밭두렁에 묻혀 있던 것을 발굴하여 옮겨 놓았다고 한다. 원래는 규모가 컸던 법주사 요사 근처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워낙 커서 10여 명의 장정이 아니면 운발할 수 없을 정도인데 국내에서 가장 큰 맷돌이다. 암돌 위쪽 가운데에 곡식을 퍼 넣는 구멍 네 개가 나 있고, 가장자리 동서남북으로 네 군데에 구멍이 나 옆구리도 패어 있다. 이 네 구멍에 굵은 끈을 끼우고, 거기에 긴 막대기를 꽂아 이 막대기 끝을 두 사람이 밀어나가면 암돌이 돌게 된다. 곡물의 양이 많을 때에는 이 막대기를 나귀에 잡아매어 끌게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 맷돌과 같이 구멍이 나 있는 맷돌은 서울의 진관사, 강릉의 낙가사, 북한산의 부황사 터에서도 발견되었으나 이곳 맷돌보다 크기가 작으며 두 구멍으로 되어 있다.
 네 구멍 맷돌은 중국에서 14세기 초에 나온 농서(農書)나 17세기의 농정서에 쓰인 마(磨)에서 유례를 볼 수 있다. 이 마는 대형 맷돌로서 암돌에 네모난 나무틀을 걸고 이를 네 구멍에 꿴 끈으로 잡아매었으며 두 마리의 나귀가 양쪽에 서서 돌리는데 법주사의 맷돌도 이와 같은 방법을 썼기 때문에 네 개의 구멍을 마련했을 것이다. 이렇게 큰 맷돌은 내몽골자치구 포두(包頭)시 역사박물관에 절에서 나온 것이 보관되어 있고, 중국 돈황의 민속박물관에도 소장되어 있으며, 카자흐공화국의 알마아타박물관과 우즈베크공화국의 브하라박물관에도 소장되어 있다. 이로 보아 구멍 맷돌이 중앙아시아 일대에서도 널리 쓰였던 것을 알 수 있다.

                                    ( 경상북도 문화재 사이트에서 인용)

 

법주사 오층석탑 (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27호)

법주사내의 보광명전 앞에 서 있는 탑으로, 원래는 2층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었을 것이나, 현재는 위층 기단과 탑신의 4층 몸돌·지붕돌이 없는 상태이다.

탑신은 1층 몸돌에 비해 2층 몸돌이 급격히 줄어들었고, 그 이상의 몸돌은 크기가 거의 줄지 않았다. 1·2·3층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겼고, 특히 1층 몸돌 남쪽면에는 문모양과 글씨를 새겨 놓았다. 지붕돌은 낙수면이 깊이 패이고 네 귀퉁이가 살짝 치켜올라가 우아한 곡선을 그린다. 그러나 5층만은 몸돌에 기둥 모양을 새기지 않았고, 지붕돌의 곡선도 밋밋하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들을 차례대로 얹어 놓았다.

고려시대에 세운 탑으로, 일부 석재를 잃어버려 본래의 모습을 알 수 없음이 아쉬울 따름이다.

예불을 마치신 인자하신 비구니 스님

이 마애석불이 문화재로 추진이 잘 되시길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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