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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空空)의 시선

인상 깊은곳

( 경주 여행 ) 신문왕릉,선덕여왕릉

空空(공공) 2023. 11. 12. 0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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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는 길에 왕릉 2곳을 더 보고 가기로 했다

경주 신문왕릉과 선덕여왕릉이다


▶ 사적 경주 신문왕릉 (慶州 神文王陵)

신라 31대 신문왕(재위 681∼692)의 무덤이다.

신문왕은 문무왕의 아들로 귀족들의 반란을 진압한 후 신라 중대 전제왕권을 확고히 하였다. 

국립교육기관인 국학을 설립하고, 지방통치를 위해 9주 5 소경제도를 설치하였고, 

고구려·백제·말갈인을 포함시킨 중앙 군사조직인 9서당을 완성하는 등 중앙과 

지방의 정치제도를 정비하여 전제왕권을 다졌다.

높이 7.6m, 지름 29.3m의 둥글게 흙을 쌓은 원형 봉토무덤이다. 

둘레돌은 벽돌모양으로 다듬어 5단으로 쌓았고 44개의 삼각형 받침돌이 둘레돌을 튼튼하게 받치고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낭산(狼山) 동쪽에 신문왕을 장사지냈다고 되어있어, 

낭산 동쪽 황복사터 아래쪽 12지신상이 남아있는 무너진 왕릉을 신문왕 무덤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다음은 경주 왕 중에서 가장 유명한 왕이라 할 수 있는 선덕왕릉이다

신문왕릉에서 그리 멀지 않을것으로 생각했으나 거의 15분 산 길을 올라 가 만날 수 있었다


▶ 사적  경주 선덕여왕릉 (慶州 善德女王陵)

신라 최초의 여왕이자 27대 왕인 선덕여왕(재위 632∼647)의 무덤이다. 

높이 6.8m, 지름 23.6m의 둥글게 흙을 쌓은 원형 봉토무덤으로, 

밑둘레에 자연석을 이용하여 2∼3단의 둘레돌을 쌓았다.

선덕여왕은 아들이 없던 진평왕(재위 579∼632)의 딸로서 성골이라는 

특수한 신라 왕족의식에 의해 여왕이 되었다. 

첨성대와 분황사, 황룡사 9층탑 등을 세웠으며, 김유신, 김춘추와 더불어 삼국통일의 기초를 닦았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여왕이 죽거든 부처의 나라인 도리천에 묻어 달라고 하였으나 

신하들이 이해를 못하자 여왕이 직접 도리천이 낭산(狼山) 정상이라 알려주었다. 

문무왕이 삼국통일을 한 후 낭산에 사천왕사를 지었고, 낭산의 정상이 도리천이라 한 

여왕의 뜻을 알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여기를 마지막으로 오늘 경주 문화재 탐방을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