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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空空)의 시선

인상 깊은곳

( 광주 여행 ) 광주 향교, 성거사지 오층석탑,광주 공원

空空(공공) 2016. 1. 20.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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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문화전당을 둘러 보고

지도를 보고 갈만한곳을

찾아 보니 광주 향교가 눈에

띈다

 

걸어 가면서 이정표는

찾기가 어려웠지만 물어 물어

찾아 왔다

 

골목 어귀에 있었으나 들어가는

길이 초행인 사람에게는

조금 헷갈렸다

바로 광주 공원 뒷편이다

 

마침 한분이 외삼문앞에서 청소를 하시길래

허락을 받고 광주 향교 여기 저기를 둘러 보았다

 

( 광주 향교 )

 조선태조(朝鮮太祖)가 왕이 되던 해(1392)에 각도의 안찰사(按察使)에게 교육을

개혁(改革)하라는 명을 내린 것을 계기로 광주향교는 옛난 서석산(瑞石山 현 무등산) 서쪽

장원봉(壯元峰) 아래에 세워졌으나, 호랑이가 자주 나타나서 성(城)의 동문(東門) 안으로

옮겨 지었다. 그러나 성종(成宗) 19년 서기 1488년 현감(縣監) 권수평(權守平)이 이 곳

또한 지대가 낮고 수해가 자주 일어나서 지금의 이 자리에 옮겨지었다.

그 후 선조(宣祖) 30년(서기 1597) 정유재란(丁酉再亂)때 왜적(倭敵)들에 의하여

 불에 타 선조(宣祖) 33년 서기 1600년에 관(官)과 백성이 협력하여 다시 세우고 그 뒤

수차례의 보수(補修)를 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현재의 교궁(校宮)은 대성전(大成殿), 동무(東무), 서무(西무)와 명륜당(明倫堂),

동재(東齋), 서재(西齋)와 내·외삼문(內·外三門)을 기본구조(基本構造)로 하고 그 밖의

문회재(文會齋) 양사재(養士齋), 유림회관(儒林會館), 충효교육관(忠孝敎育館)

등으로 되어 있다.

또한, 공자(孔子)를 비롯한 안자(顔子), 증자(曾子), 자사자(子思子), 맹자(孟子) 등

5성(聖)과 송나라 2현(賢)과 우리나라 18현(賢)등 25성현을 모시고 봄, 가을에 제사를

올리고 있다           ( 광주 향교 안내문에서 인용)

 

 

 

 

 

 

 

 

 

광주 향교는 규모는 크지 않지만 그 구조가 깔끔하다

입구인 외삼문을 보고 좌측에 명륜당이 있고 동재와 서재 그리고 내삼문 대성전이 자리 하고 있다

명륜당 좌측에는 수령이 250년된 측백나무가 있었다 

 

광주 향교 우측편으로 광주 공원이 있어 자연스레 가 보게 되었다

광주공원은 광주시의 제1호 공원으로 시민들이 즐겨찾는 휴식공간이다. 옛날에는 성거사가 있었으며 일제강점기 때는 일본인들의 신사가 있던 곳인데 현재는 현충각과 광주시립 박물관, 시민관 등이 자리하고 있다.주요 시설로는 복원된 사직단과 광주방송총국(KBS), 경찰충혼탑, 연파정, 전통국궁 수련장인 관덕정, 시가지를 조망할 수 있는 팔각정 등이 있다. 현충탑을 중심으로 한 공터는 노인들의 휴식처로 애용된다. 광주공원은 장수의 상징인 거북이 형상을 하고 있다. 각종 수목과 화초를 이용한 조경이 잘 되어 있으며, 매년 4월 중순이면 벚꽃이 만발한다.

광주공원은 원래 나라의 안전과 풍년을 기원하며 땅의 신과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올렸던 사직단이 있던 곳인데, 1894년 제사가 폐지되고 1960년대 말에 사직동물원이 들어서면서 사직단은 헐리고 말았다. 그 뒤 사직단의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야 한다는 여론이 조성되자 1991년 동물원을 우치공원으로 옮기고 사직단을 복원하여 1994년 4월 100년 만에 사직제가 부활했다.

 

 

 

 

충혼탑

 

 

 

 

 

아직 단풍이 남아 있었다

 

광주 공원 반대편 입구쪽에 보물 제 109호인 성거사지 오층석탑이 있었다

지도를 보지 않았더라면 못 보고 갈뻔 했다

광주 공원에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 와서 보게 된 유적이다

물어도 아는 사람이 없어 내 발로 찾아 갔다

광주공원 안에 있는 고려 전기의 석탑으로 이 부근은 성거사(聖居寺)터라고 전해진다. 이 광주공원은 원래 성거산(聖居山)이라 불렀는데, 산의 모양이 거북처럼 생겼으므로 광주를 떠나지 못하도록 등위치에는 성거사를 세우고 거북의 목 부근에는 5층석탑을 세웠다고 한다.

1단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석탑으로, 통일신라시대의 2단 기단 양식에서 기단을 1단만 두는 고려시대로의 양식변화를 보여준다. 또 지붕돌 추녀와 몸돌의 알맞은 비례감과, 위로 오르면서 줄어드는 비율이 크지 않아 전체적으로 높게 보이면서도 안정감이 있다.

가장 큰 특징은 1층 몸돌에서 나타난다. 즉 몸돌 전체를 아래위 2단으로 나누어 5개의 돌을 맞추고 있는데, 이러한 양식은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고려시대에 흔히 나타나는 특색이다. 또한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4단이고 각 귀퉁이는 아래위 모두 약간씩 치켜올려진 상태이다.

1961년 해체하여 보수할 때 2층 몸돌에서 사리공(舍利孔)과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어 이 석탑의 연대를 파악하는데 중요한 근거가 된다. 1층 몸돌과 3층 몸돌은 보수할 당시에 보충한 것이다.
                                               ( 문화재청 소개에서 인용)

 

 

 

사찰은 비록 지금은  볼수 없지만 탑은 홀로이 남아 있다

 

길이 길이 보존되어 이 자리를 지켜 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