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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空空)의 시선

인상 깊은곳

효자의 기준 그리고 하효자 정려각

空空(공공) 2017. 2. 1. 0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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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다 보면 정려각을 가끔 만나게

된다

정려각이란 충신, 효자, 열녀 등을 기리고자

정문(旌門)을 세우고 표창하기 위해 건립한

상징적인 건물로 내부에 정려비나 현판처럼

만든 정려기를 모신다

보통은 그 사람이 사는 마을 입구나 집앞에

세우는것이 일반적이다

충신,열녀는 사당앞에 홍살문을 세우기도 했다

 

책을 읽다 효에 대한 내용이 있어 작년 가을에 다녀 오고 올리지 못했던 하효자 정려각이

생각이 났다

하효자정려각(夏孝子 旌閭閣)

문화재자료 제18호    (1989. 6. 15 지정)
소재지 : 수성구 만촌동 389-97

 
   효자(孝子) 하광신(夏光臣) 정려비는 대구 경북 일원에서 가장 오래된 효자비의 하나로 고려 때 이부사랑을 지냈던 하광신의 지극한 효성을 기리기 위하여 조정에서 정문을 세운 것이다. 고려 충숙왕이 그의 효행을 듣고 1327년 그가 살던 이 마을에 "이부시랑하광신지려(吏部侍郎夏光臣之閭)"라는 현판을 붙인 정문을 세우게 하였던 것이다.

    하광신의 정려가 세워진 곳은 달성 하씨들의 세거지였던 현재의 대봉동 수도산 근처였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버렸다. 그때 달성 하씨들은 당시 14세 소년이던 하인경을 제외하고는 모두 희생되는 바람에 명맥마저 끊길 지경이었다. 그 때문에 그들은 대구의 토족이면서도 지금 그 숫자가 매우 적다.

    현재의 정려비는 1781년(정조 5)에 만촌동 형제봉 기슭에 중건하였으나 일제시대에 경부선 철도가 놓이면서 헐려 현 위치로 다시 옮겨 진 것이다.

   정려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규모로 전면은 홍살창이며 뒷벽은 약50cm의 고맥이 위에 판벽을 설치했으며 양측면은 판벽위에 홍살창을 설치한 겹처마의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다.

                                                                            ( 대구 스토리에서 인용)

 

주택가 외진곳에 있어 일부러 찾아가기는 참 쉽지 않다

조선 시대에는 효자에게 "정문"과 '복호"라는 상을 내렸다

정문이란  홍살문이나 정려각을 이름이고 복호는 부역이나 군역,조세등의 호역을 면제해 주는것이다

효자를 선정한 기준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부모에게 먹여 응급조치토록 한 "단지(斷指)"를 하거나

부모를 위해 허벅지 살을 베어내었던 "할고(割股)"를 한 사람들이 세간에 알려져 선정 되었다

또 부모의 병세를 살피기 위해 대변을 맛 보는 "상분(嘗糞)"도 있었고 "조문(蚤蚊)" 효행도 있었다

조문은 벼룩과 모기를 말하는데 부모와 함께 잠을 잠으로 밤에 설치는것들을 자신의 몸으로 유인해

부모는 물리지 않게끔 한 효도다    ( "조선 과학 실록 -이성규 저"  에서 일부 인용)

 

부모님이 나이가 들면  거의 같이 살지 않는 요즘

가슴 깊이 생각해볼 이야기다

 

'효"와 거리가 멀었던 나에게 가시같은 가르침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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