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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空空)의 시선

인상 깊은곳

( 부여 여행 ) 백마강,황포돛배, 고란사,낙화암

空空(공공) 2016. 12. 15.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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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강 그러면 우리 국민이라면 가보지 않았어도

한번쯤은 들어봤음직한 강이다

또 어느 정도 나이가 드신분들은 배호의 노래 "추억의 백마강"이나 허민의 "백마강"이란

노래로 익숙한곳이기도 하다

사실 백마강은 부여를 지나는 금강의 하류 구간을 부르는 이름이기도 하다

 

구드래 나루터에서 황포돛배를 타고 고란사를 보고 낙화암을 거쳐 부소산성을 돌아 보았다

황포돛배

황포돛배는 황토로 물들인 돛을 단배를 말한다

어업에 주로 이용된 황포돛배는 대부분 0.4t에서 0.5t 정도의 작은 배이다. 몸통은 스기나무로 만들고 노는 쪽나무로 만들며, 돛대는 죽나무와 아주까리나무로 만든다. 돛대는 6m 정도로 길게 세우고, 황토를 물들인 기폭을 매단다. 가로 2m 50㎝, 세로 6m의 기폭을 황톳물에 담가서 물을 들인 후에 잘 말려서 사용한다. 황톳물은 두세 번 반복하여 들인다. 한번 마련한 기폭은 2~3년 정도 사용할 수 있다.                    ( 디지털논산문화대전에서 인용)

구드래 나루터

황포돛배

멀리 고란사가 보인다

고란사

고란사(皐蘭寺)는 충청남도 부여군, 부소산의 북쪽 백마강변에 있는 절이다.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98호로 지정되었다. 마곡사에서 갈라져 나온 절이며, 법당 건물은 숭각사를 옮겨 중건 하였다.

고란사 바로 위쪽으로 낙화암이 있다. 절 뒤의 바위틈에는 고란정이 있고, 그 위쪽 바위틈에는 고란초가 자라고 있다.

절의 연혁에 대해서는 백제 말기에 백제 말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할 뿐, 자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일설에 의하면 이 절은 원래 백제의 왕들을 위한 정자였다고 하며, 또 궁중의 내불전이었다고도 전한다. 혹은 백제가 멸망할 때 낙화암에서 사라져간 궁녀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고려 현종 19년(1028년)에 지은 사찰이라고도 한다.

법당 건물은 1797년(조선 정조 21년)에 은산의 숭각사에서 옮겨온 것이다.상량문에 의하면 조선 정조 21년(1797년)에 중건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연화문을 새긴 초석을 놓고 원기둥을 세웠는데 기둥 위에는 조각 장식이 화려한 익공식 공포를 짜올렸다. 초석에 새견 연화문양은 고려시대의 기법으로 추정된다.                                   ( 위키백과에서 인용)

백마강이나 꿈꾸는 백마강 노래에는 공히 고란사의 종소리가 가사에 있는데 종소리는 들을수

없었다

고란정에 있는 고란 약수를 한잔 마시면 3년 젊어진다는 전설이 있다

나는 한잔을 마셨는데 같이 간 사람은 많이 마셨다..그래서 난 아기와 살고 있다^^

낙화암

 화암(落花岩)은 충청남도 부여군 부소산에 있는 바위이다.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의 문화재자료제110호로 지정되었다.백제 의자왕 20년(660년) 나(羅)·당(唐) 연합군의 공격으로 백제의 수도 사비성이 함락될 때, 백제의 3천 궁녀가 이곳에서 백마강(白馬江)을 향해 몸을 던졌다는 전설에서 유래한 바위이다.낙화암 절벽 위에는 1929년에 궁녀들을 추모하기 위해 육각형의 《백화정》 정자를 건립하였다. 아래에는 송시열(1607-1689)의 글씨로 전하는 '낙화암'(落花岩)이라고 조각된 글씨가 새겨져 있다                     ( 위키백과 인용)

낙화암이라는 붉게 채색된 글씨가 보인다

글은 우암 송시열선생이 썼다고 하고 붉은 채색은 후대에 누군가가 잘 보이라고 덧 입혔다고 한다

백화정 ( 충청남도 문화재 108호 )

1929년 궁녀들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비록 전설이지만 나라와 정조를 위해 몸을 던졌다는 삼천 궁녀의 이야기가 있는 이곳

나라가 있어야 현재의 나도 있다는것을 생각하게 해 준다

 

그 나라를 있게 하기 위해 수많은 국민들이 촛불을 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