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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空空)의 시선

인상 깊은곳

( 대구 달성) 녹동서원 그리고 달성한일우호관

空空(공공) 2015. 9. 21.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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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근교 청도 방향으로 달성 가창면 우록리에는 "징비록" 드라마로 재조명된

임진왜란 당시 3천명의 병력을 이끌고 투항,조선으로 귀화한 일본인 장수 사야가

( 한국명: 김충선) 를 모신 서원이 있다..그 곳이 녹동 서원이다

 그리고 그 서원 옆에 그의 일대기와 임진왜란등 한일 관련 역사를 정리해 놓은

2012년 개관한 한일우호관이 있다

 

명나라의 쇠퇴로 귀화하였던 두사충과 달리 김충선의 귀화 이유는 명확치 않다

임진왜란당시 부산 상륙때

"금사출무명(今師出無名) 도욕화린국(徒欲禍隣國) 유사이종지비부 (有死耳從之非夫)"

금번에 일본이 군사를 일으켜 전쟁을 하는 것은 명분이 없고 가까운 이웃나라에

화만 끼칠 뿐이다.나는 죽을 수는 있지만 명령에 따를 수 없다.

라는 말을 남겼지만 내가 생각할때 복잡한 그의 속내는 알길이 없다

 

김충선 장군은 임진왜란 당시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우고 인조때 이괄의 난에도 혁혁한 공을

세운바 있고 이곳 우록에서 그 생을 마쳤다

 

녹동서원은

모하당 김충선 장군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향도(鄕道) 유림(儒林)들의 공의(公議)로 상소(上疏)하여

정조(正祖) 15년 신해(辛亥)(1791)에 건립하였다.
그 후 고종(高宗) 8년 신미(辛未)(1871)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毁撤)되었다가

1914년 다시 복원하였으나 후손이 늘어남에 따라 규모가 협소하여 국고의 지원을 받아 1972년

지금의 장소로 이축과 동시에 증축하였다.  ( 한일 우호관 사이트에서 인용) 

 

 

 

 

 

 

 

 

 

 

 

 

 

 

 

 

 

김충선의 묘는 300m 산을 올라가야 한다

 

올라가는 길은 잘 되어 있었으나 후손들외 묘소는 잘 안 찾는듯 하다

 

 

 

 

 

 

 

장군이 남긴 4편의 시중에서 남풍유감이란 시가 있다

그 시의 내용을 잘 보면 그의 번뇌를 조금은 알수 있을듯도 하다

 

- 남풍유감시취(南風有感時吹) 개호입방내(開戶入房內) 조연유성거(條然有聲去) 소식무인래(消息無人來)

남풍이 건덧불어 문을 열고 방에 드니 행여 고향 소식 가져올까

남의 퇴침 급히 일어나 앉으니 거어인 광풍인제 지나가는 바람인제

홀연유성(忽然有聲) 홀불견(忽不見)이라 허히탄식하고 성그러이 앉으시니 이내 생전의 골육(骨肉至親)
소식을 알길이 없어 슬프하노라

 

명분과 혈육의 정 사이에서 그는 수많은 날을 회한으로 보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