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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空空)의 시선

이것도 저것도 아닌

대구 시내 나들이-2.28공원 그리고 국수와 빙수

空空(공공) 2015. 9. 12.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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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대구를 떠나 있던 내게 이곳은 중앙 국민( 초등) 학교 자리로 기억에

남아 있다

지금의 내 모교도 그렇지만 시내 중심지의 초등학교는 학생수가 날로 감소해 1990년대

중반에 폐교가 되었다 ( 이후 수성구로 자리를 옮겨 다시 부활되었다 )

 

그 자리에 2.28기념공원이 세워 졌다

2·28 대구 학생의거(二二八大邱學生義擧) 이승만 정권 시절인 

1960년 2월 28일 3.15 대선을 앞두고 자유당 독재에 항거, 대구에서 일어난

학생의거는 이후마산 3.15 부정선거 항의시위로 이어졌고 4.19 혁명

도화선이 된 사건이다.

민주당 정.부통령 후보인 장면 박사의 유세일 당일은 일요일이었으나 학생들이

민주당 유세장에 못나가도록 당국이 등교 지시를 내린 것이

2·28 대구 학생의거의 발단이 되었다.

경북고는 일요일인 이날 등교지시를 내린다. 사유는 3월에 있을 중간고사를

앞당겨 친다는 사유였다.

 대구시내 다른 국공립 고등학교 7개 역시 일요등교를 지시 한다.

사유는 토끼사냥, 영화관람과 같은 황당한 이유도 있었다.

1960년 2월 27일 오후 대구 동인동 이대우 경북고 학생부 위원장 집에 

경북고, 대구고, 경북대부속고 학생 8명은 부당한 일요등교 지시에 항의를

하기 위해 시위를 조직했고, '백만 학도여 피가 있거든 우리의 신성한 권리를 위해

서슴지 말고 일어서라'는 결의문도 작성했다.

 2월 28일 오후 1시 학생 800여 명이 대구 반월당을 거쳐 도청으로 가는 과정에서

 다른 학교 학생들이 합류하며 시위대는 커졌고 도중에 유세장으로 가던 장면 박사를

만났을 땐 '만세'를 부르기도 했다.

당시 도지사는 학생들에게 "이놈들 전부 공산당"이라고 한 반면, 시민들은

구타당하는 학생을경찰에게 달려들어 말리고 박수를 쳤고, 치맛자락에 모자를 감춰

학생을 숨겨주는 부인이 대부분이었다.

1200여명의 학생이 시위에 참여를 했고 그 중 120여명이 경찰에 체포된다.

 하지만 경찰은 시위가 번질 것을 우려해 주동자 일부를 제외 하고

대부분 학생을 석방하게 된다.

                                                                           ( 위키 백과에서 인용)

 

 

 

 

 

노년엔 공원에서 책 읽어도 좋을텐데..

그때까지 눈이 괜찮을지 모르겠다

 

시내 나들이 나왔다가 때가 되니 배가 고파진다

중심가에는 먹을게 많아 좋다

 

앗! 2천원짜리 국수집을 발견했다

중심가에서 이렇게 싸게 팔기가 쉽지 않을터인데..

 

양이 적다 싶으면 곱배기를 시켜도 된다

곱배기는 \2,500원

 

 

 

김치와 물은 셀프

 

 

먹고 먹은 대로 돈을 통에 넣고 나오면 된다

후식으로 팥빙수를 사 먹었다

옛날 팥빙수..

 

오랫만에 먹어서 그런지 정말 맛있었다

한낮의 더위도 저 멀리 달아난 느낌..

 

과거 추억을 곰씹어 보게 한 즐거운 중심가 나들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