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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空空)의 시선

인상 깊은곳

( 대구 가볼만한곳 ) 모명재

空空(공공) 2015. 7. 27.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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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 열명 가운데 세명..즉 30%의 국민들은 다른 나라에서 이주해온 선조를 두고 있다

중국과 일본은 말할것도 없고 네덜란드, 인도, 유구, 베트남, 몽골, 여진 위구르, 거란족과 흉노족,

 발해 유민 등 실로 많은 민족의 출신이 한반도에 들어와 한민족이 된 것이다.

 

그 중에 전쟁 중에 귀화한 장수들이 있다

이성계의 오른팔 여진족 이지란이 있었고  임진 왜란때 귀화한 일본인 사야가 김충선이 있으며

정유재란때 눌러 앉은 명나라의 장수 두사충이 있다

 

두사충(杜師忠)은 중국 시성 두보의 2대 후손 기주자사 두교림의 아들이자 명나라 최고의 풍수지리가

1592년 임진 왜란때 원군으로서 공을 세웠고 벽제관 전투에서 대패 명나라 총사령관 이여송이

참수하려 했으나 조선 대신들의 설득으로 목숨을 구했으며 1597년 정유재란때 명나라의 수군으로

남해로 출전하였으며 이때 이순신 장군과도 우의를 맺었다

 

전쟁이 끝나고 풍수지리에 뛰어났던 두사충은 명나라의 운이 다했음을 알고 귀국하지 않고

대구를 정착지로 해 눌러 앉았다

그가 "하루에 천냥이 나오는 명당'으로 꼽은 곳은 후에 경상 감영이 들어 섰으며  경상감영이 들어선이후에는

계산동으로 옮겨 뽕나무를 심었고 ( 대구가 섬유 도시가 된 배경이 됨) 다시 거처를  옮기고

그곳을 대명동이라 붙였다 ( 대구에서 면적이 가장 큰 동네) 그리고 명을 그리워 한다는 뜻의

모명 (慕明)을 호로 삼았다

풍수지리에 밝았던 그는 묻힐곳을 찾다가 기침 가래가 심히 끓어 발길을 돌린 고개 ( 담티 고개 )에서

가까운 형제봉에 묘자리를 쓰라 했고  그 자리가 지금의  모명재라는 재실과 묘소가 있다  ( 안내문 일부 인용)

 

이렇게 두사충은 지금의 대구에 많은 흔적을 남겼다

 

그 모명재를 찾았다

 

모명재에서 형제봉으로 가는 등산로도 있다

그 입구이다

 

입구,깨끗하게 조성이 되어 있다

 

모명재 주위에는 베롱나무(백일홍)이 많다

두사충이 배롱나무를 좋아했다 한다

 

모명재 가기전 명정각이  있다

이곳은 두사충의 7대손인 두한필의 효행을 널리 알리기 위한 조정에서 내린 정려이다

 

 

종3품에 해당하는 통훈대부 규장각직각이란 벼슬을 증직하였다

 

 

부용이 아름답게 피었다

 

모명재 대문 "만동문"

모든 하천은 동쪽으로 흘러 간다는 백천유수 필지동 그 근본을 잊지 않겠다는 뜻

 

신도비 충무공의 7대손인 삼도수군통제사 이인수가 비문을 지었다

 

 

 

명나라에서 가져온 청석으로 다듬은 문인상

 

 

 

 

 

 

 

 

今日一盃情 ( 금일일배정) 오늘은 한잔 술로 정을 나누세

 

이순신 장군이 두사충장군에게 보낸 한시 "봉정두복야"에 나오는 구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