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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空空)의 시선

인상 깊은곳/서원_향교

( 경주 여행 ) 서악서원,도봉서당

空空(공공) 2020. 5. 29. 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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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를 가면 근처의 서원은 웬만하면 찾아 본다

경주 지역에도 꽤 많은 서원이 있다. 작년 1월 옥산 서원을 찾은 이래 2번째 경주 지역 서원 방문이다

 2019/01/10 - [인상 깊은곳/서원_향교] - ( 경주 여행 ) 경주 옥산서원-퇴계 이황선생 스승 회재 이언적을 기린곳


 서악서원 (西岳書院)  경상북도 기념물 제19호

신라 삼국통일의 중심인물인 김유신 장군과 신라 학자인 최치원, 설총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조선 명종 때 문신인 이정(1512∼1571)이 경주부윤이라는 벼슬을 지낼 때 지방 유림과 뜻을 같이하여 명종 

18년(1563)에 세운 것이다. 선도산 아래에 ‘서악정사’로 세운 것은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고 1602년 묘우, 

1610년 강당과 동·서재를 새로 지었다. 

인조 원년(1623)에 국가가 인정한 사액서원으로 ‘서악’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에도 폐쇄되지 않고 살아 남은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경내에는 위패를 모신 묘우와 교육 장소인 동시에 유림의 회합 장소로 사용하던 조설헌이라는 강당과, 

동재·서재로 유생들의 숙식 장소로 사용하던 시습당과 절차헌, 제사 음식을 준비하던 전사청 그리고 영귀루라는 

누각이 조성되어 있다. ‘

서악서원’이라는 현판은 당시 명필인 원진해(元振海)가 쓴 것이다.

 현재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해마다 2월과 8월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에서 인용 )


서원 옆에는 고택 숙박이 가능하다

1. 본채 : 주중 5만원, 주말/성수기 7만원 

2. 별채 - 고직사 : 주중 10만원, 주말/성수기 12만원 - 

사랑채 : 주중 10만원, 주말/성수기 12만원    ( 2018년 요금 현재와 다를수 있음)

외삼문

서원을 처음 건립한 부윤 이정의 비

정면 5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집이며, 좌우에 판벽을 드리우고 트인 사면에는 계자난간을 둘렀다. 

예전에는 이 영귀루가 누문이었던 것으로 여겨지지만, 현재는 앞쪽에 외삼문(평삼문)으로서 도동문이 서있다.

서악서원 시습당

강당(講堂)이다. 시습(時習)이라는 이름은 《논어》학이편(學而篇)의 첫머리 「배우고 또한 때때로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 不亦悅呼)」에서 따온 것이다. 전퇴를 둔 중당협실형(中堂夾室形)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집이다. 중앙 3칸은 우물마루이고 양쪽은 각 1칸짜리 온돌방이며, 왼쪽 방은 진수재, 오른쪽 방은 

성경재라 쓴 편액을 달았다.

대청에는 다섯 개의 현액이 있는데, 가장 오래된 것은 「만력 경술(1610년) 가을 문소후인 

김득질이 찬한다(萬曆庚戌秋聞韶後人金得秩撰)」이라 적은 것으로 서악서원을 중수할 때의 상량문이고, 

나머지는 중수기이다. 연대 순서대로 「상지 10년 계유(1873년) 가을 8월 상한에 부윤 이만운이 

찬한다(上之十年癸酉秩八月上澣府尹李晩運撰)」, 「숭정 지원후5 임오(1882년) 6월 하완에 여강 이능정이 

기록하다(崇禎紀元後五壬午流月下浣驪江李能政記)」, 「상지 29년 임진(1892년) 12월 일에 부윤인 원장 민영수가

 찬한다(上之二十九年壬辰十二月日府尹院長閔泳壽撰)」, 그리고 1923년 이후에 적은 것으로 보이는 「

입추절 하완 통사랑 권지능문완부정자 월성 최현필이 기록하다(立秋節下浣通仕郞權知承文浣副正字月城崔鉉弼記)」

라고 적은 기록들을 통해 서악서원의 중수 시기를 알 수 있다.


서재(조설헌)

동재와 대칭으로 된 평면을 하고 있다.

동재(절차헌)

정면 5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집으로 강당인 시습당에서 영귀루 쪽을 향할 때 차례로 온돌방 2칸, 대청 2칸, 

온돌방 1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강당과 연결되는 디딤돌은 보기 힘들다

내삼문

사우로 통하는 문으로, 평삼문 맞배집이다.

사우(祠宇)

서원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의 하나인 제향을 위한 곳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집으로 전퇴가 없다.

야사에는 이곳 한 서생이 김유신은 무장이어 제사에서 빼고 조정의 사액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을 했는데

꿈에 김유신이 나타나 "유학자들이 중히 여기는 덕목이 충(忠)과 효(孝)가 아니던가. 내가 살아서는 위태로운 

나라를 위해 전장에 나아가 어려움을 구제하고 삼국을 통일하는 공을 세웠으니 그것이 충이고, 

공을 세우고 입신양명하여 내 집안과 부모의 이름을 빛나게 했으니 그것이 효인데, 네까짓 놈이 어찌 함부로 

이야기하느냐."라며 호통을 쳤다 한다

깨어난 서생은 두려워하며 시름시름 앓다가 이틀만에 피를 두 말이나 토하고 죽고 말았다고 한다.



다음으로는 도봉 서당을 찾았다

서악서원 가까운곳에 위치하고 있다

경주도봉서당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97호 

도봉서당은 조선 성종 대의 학자였던 불권헌 황정(1426-1497)의 학덕과 효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1545년

(중종 1년) 지금의 위치에 추보재라는 묘사재실로 건립되었다. 

이후 전란과 긴 세월을 거치며 훼손되었고, 이를 안타깝게 여긴 불권헌 황정의 후손들이 1915년 추보재가 

있었던 자리에 도봉서당 일곽을 중건한 것이 현재의 모습이다.

  이 서당은 숭앙문·도봉서당·추보재·연어재·상허당 등 모두 7도이며 일종의 서원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배치형식은 재사를 강당 뒤에 둔 전강당 후재사형인데, 이는 경상도 지역에서 보기 드문 예이다. 

강당(도봉서당)은 정면 5칸·옆면 1.5칸으로 전면에 툇마루를 두었고, 옆·뒷면에 쪽마루를 둘렀다. 

사당(상허당)은 정면 4칸·옆면 1.5칸이며, 중당협실로 구성된 바로 볼때 강당형식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서재(연어재)는 남쪽과 동쪽면을 모두 팔작지붕으로 처리하여 두 개의 정면을 갖게 한 점이 눈길을 끈다.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에서 인용 )

숭앙문

도봉서당

상허당

연어재

추보재

비교적 잘 관리되고 있는 모습이었다

주차장은 앞쪽이 아니고  왼편으로 돌아 뒷쪽에 있다

☞ 5월1일 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