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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空空)의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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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 관덕리 3층 석탑 -보물 제188호

空空(공공) 2018. 10. 3. 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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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에서의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집으로 돌아가는길

시간의 여유가 약간 있어 문화재 하나를 더 보고 가기로 했다

다행히 아무도 반대하거나 싫어하는 눈치가 안보여 저으기 안심이 되었다

사실 관심이 없으면 지겨울수도 있는데 말이다

 

찾아가고자 한곳은 보물 제 188호인 관덕리 3층 석탑..찾아 가는길이 쉽지는 않다

아마 혼자였다면 찾아가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 의성 관덕리 3층석탑 ( 보물 제 188호 )

 2단의 기단(基壇)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석탑으로, 각 부분의 장식이 풍부하다.

아래층 기단의 4면에는 가운데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하나씩 새기고, 조각에 의해 나누어진 8곳에 비천상(飛天像)을 도드라지게 조각하였다. 윗층 기단에도 각 4면의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새긴 후, 기둥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4천왕상(四天王像)을, 오른쪽에는 천부상(天部像)을 배치하였다. 사천왕과 천부상은 모두 부처의 법을 보호하고 지키는 신으로 이들을 이렇게 복합적으로 표현한 것은 보기 드문 모습인데, 이는 통일신라 후기에 가져온 변화인 듯 하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졌으며, 1층 몸돌의 4면에보살상(菩薩像)을 돌아가며 새겼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1층과 2층은 4단, 3층은 3단으로 줄어 있으며,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가 네 귀퉁이에서 살짝 위로 젖혀 있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이 없어지고 이를 받쳐주던 네모난 받침돌만 거꾸로 놓여져 있는데, 이는 후대에 와서 흐트러진 것으로 보인다. 그 위로 얹혀있는 돌은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원래 위층 기단 윗면의 네 귀퉁이 마다 암수 2마리씩 돌사자 네 마리가 있었으나 이 중 2마리(보물 제 202호, 의성 관덕동 석사자)만 남아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렇듯 동물을 등장시키는 경우는 경주분황사 모전석탑이 가장 앞서고 이후 통일신라 후기까지 그 양식이 줄곧 이어져 내려왔다.

탑에 장식적인 화려함을 더하게 되는 본격적인 시기인 9세기 정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전체적으로 웅장한 기상은 덜하나, 많은 조각을 새겨 놓아 화려하고 아름답다.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 포털에서 옮겨옴 )

 

의성 관덕리 3층석탑은 외진곳에 있었다

머리 장식이 없어지고 받침돌이 거꾸로 놓여져 있다

원래 4귀퉁이마다 암수 2마리씩 돌사자가 있었으나 2마리는 없어지고 2마리는 ( 보물 제 202호 ) 경주국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가 대구국립박물관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지금 있는것은 그것을 본떠 만든 것이다

뒤에 있는 사당은 관리가 좀 필요해 보인다

경북 유형문화재 제136호 석불좌상

그런데 누가 소주병을.... ㅠㅠ

 

아기 사자가 보이는것이 암놈 사자

여기는 아기 사자를 2마리 품고 잇다

3층 석탑 조금 떨어진곳에 있는 제실 조금 방치되어 있어 보였다

 

이 아름다운 석탑에 아픈 수난사가 있었다

 

조문국 박물관 김호년씨가 쓴 글에 의하면 일제강점기, 일인(日人)들의 석조예술품에 대한 탐욕이 이곳에까지 미치게

되었고, 이곳에 있는 3층석탑을 대구에 살고 있던 일인(日人)이 1931년에 탑을 매각하여 해체해 가져가려 하였으나

주민들의 반발로 실패하고 원위치에 복원하였다.

이홍식 박사의 회고에 의하면, 이일인(日人)이 바로 대구에 살고 있었던 오구라 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를 지목하고

있다. 오구라(小倉)가 당시 이 탑을 자신의 집으로 가져가려다 총독부 당국으로 부터 제지를 당한 일이 일인들 사이에

잘 알려져 있었다고 한다. 오구라는 우리나라 문화재를 1000여점이상 일본으로 반출시킨 자이다

.
1층 사리공에서 꺼낸 사리함은 그의 수중으로 들어간 걸로 짐작된다

출처 : 경북중앙뉴스(http://www.gbjanews.kr)

 

외진곳에 있지만 잘 보존하여야 할 우리의 역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