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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空空)의 시선

인상 깊은곳

( 대구 가 볼만한곳 ) 육신사.태고정-사육신을 생각하며

空空(공공) 2016. 5. 12.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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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달성군은 넓은 면적인 만큼이나 관광지,문화재들이 산재해 있어

한번에 돌아 보기는 참 힘들다

하빈쪽에 들러볼곳이 몇군데 있었는데 벼르고 벼르다가 다녀 왔다

처음 찾아간곳은 "육신사"다

육신사는 삼촌에게 왕권을 빼앗긴 어린 왕 ‘단종’의 복위를 꾀하려다 숨진 사육신으로 일컫는 조선 세조 때의 박팽년, 성삼문, 이개, 유성원, 하지위, 유응부 등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취금헌 박팽년(醉琴軒 朴彭年) 선생만을 그 후손들이 모셔 제사를 지냈으나 선생의 현손(玄孫)인 박계창이 선생의 기일에 여섯 어른이 사당 문 밖에서 서성거리는 꿈을 꾼 후 나머지 5위의 향사도 함께 지내게 되었다. 그 뒤 하빈사(河濱祠)를 지어 제사를 지내다가, 숙종 20년(1694년) 낙빈(洛濱)이란 현액을 하사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고종 3년(1866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페령으로 낙빈사가 서원(書院)과 함께 철거되었으며, 1924년 낙빈서원이 재건되면서 위패를 다시 봉안하게 되었다. 이후 1974년부터 1975년 사이에 ‘충효 위인 유적정화사업’에 의해 현재의 위치에 육신사로 이름을 붙여 사당을 재건하였고, 2003년부터 2011년에 걸쳐 충절문을 세우고 전통가옥을 복원하였다.
사우건물인 숭정사에는 육신과 더불어 박팽년의 부친인 중림(仲林, ?~1456년)의 위패도 함께 봉안되어 있으며 정면 5칸, 측면 3칸의 규모에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어 웅장한 느낌을 준다. 경내에는 이외에도 정면 5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홑처마 팔작지붕인 숭절당, 태고정(보물 제554호), 외삼문, 내삼문, 홍살문, 삼층각 등이 있고 사당 앞에는 사육신의 행적을 기록한 육각비(1979년 건립)가 세워져 있다.   ( 대한민국 구석구석에서 가져 옴)

 

까마귀 눈비 맞아 희는 듯 검노매라
야광 명월이 밤인들 어두우랴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고칠 줄이 이시랴

박팽년의 유명한 시조다

박팽년은 세조 집권시 충청도관찰사로 재직할당시  조정에 장괘를 올릴때 한번도

臣이라는 글귀를 쓰지 않았다

그래서 세조가 대노하여 삼족을 멸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의 후손이 없을뻔 하였으나 둘째 며느리가 임신상태에서 노비로 가게 되고

여종의 기지로 후손이 살아 남았다

그 후손이 후일 성종에게 사면된 박일산이고 그 박일산이 이곳으로 와서 살게 된것이다

 

육신사로 들어가는 마을 입구에 세워진 충절문

 외삼문 현판 글씨 "육신사"는 박정희가 썼다고 한다

 쿠데타의 장본인이 쿠데타에 반대한 사람들 사당에 현판글씨를 쓴 심정은 무었일까

아이러니하다

 잡귀가 무서워 한다는 홍살문

 

 사주문

 사주문 안으로 보이는곳 동재

 숭절당과 동재..숭절당은 제사를 위한 건물이다

지은지 100년 남짓 되었다

 서재

 안에서 본 외삼문

 육신 사적비

 육신 6분의 성함과 공적이 씌어져 있다

 이 휘호가 왜 이 자리에..

쿠데타 중심에 섰던 인물들인데...

 내삼문

숭정사..사육신의 위패를 모신곳이다 

태고정 ( 보물 제 554호) 

태고정은 본래 부형골에 99칸으로 지었던 것인데, 제 13대 조선 성종 10년(1479)에 박 팽년의 유복 손인 박 일산이 창건한 정자이다. 그 후 선조 25년(1592) 5월 28일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일부만 남아 있던 것을 선조 29년(1596)에 충관공 박 중후가 다시 세웠으며, 광해군 6년(1614)에 중건하였다

 

 

 

 

 제택

한석당 유적비 

 충의사

 

 

박팽년은 아모리 여필종부(女必從夫)인들 님마다 조츠랴 했다

역사는 기록하고 기억할것이다..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사람들을..

그리고 그에 항거한 사람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