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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空空)의 시선

인상 깊은곳/고택,고건축물

( 영천 여행 ) 자양서당,동린각,정용준씨 가옥,환구서원,선정사,환구 세덕사

空空(공공) 2017. 12. 14. 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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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 계획했던 곳을 돌아보고

시간이 좀 남아 있길래 가는길에

있는 문화재는 둘러 보고 가기로

했다

 

생각보다 많은 문화재들이 있는것

같았다

이 지역이 예로부터 강직한 선비들의

고향임을 미루어 짐작할수 있었다

 

영천호는 이렇게 펜스가 쳐져 있다

자양서당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78호

 이 건물은 1546년(명종 1) 호조참의(戶曹參議) 김응생(金應生)등이 향리의 후진 양성을 위해 창건한 자양서당이다. 후대에 중건 되었다고 하는데 그 연대는 확인 할 수 없다. 노항동에 있었으나 영천댐 수몰지구에 편입되어 1977년 7월 현재의 위치로 이건·복원하였다. 삼매리 뒷산을 배경으로 일곽을 이루어 서북향으로 자리잡고 있는데 건물 주위의 담장과 일각문은 현 위치에 이건하여 복원할 때 세운 것이다.
 정면 4칸, 측면 1칸의 '一'자형으로 전면에 쪽마루를 둔 2칸 대청과 온돌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청 바닥은 우물마루를 깔았으며, 천장은 연등천장으로 구성하였다. 온돌방 전면 각 칸에는 쌍여닫이 세살문을 달고, 방의 우측칸 문얼굴 위에는 ‘자양서당(紫陽書堂)’이라는 편액을 걸어 놓았다. 대청과 온돌방 사이에는 쌍여닫이 세살문, 대청의 뒷벽에는 쌍여닫이 판문을 달았으며, 대청의 우측 벽에는 광창을 내어 통풍과 채광을 도모하였다. 나즈막한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그 위에 방주를 세워 보아지를 끼운 민도리 집이다. 상부가구는 3량가로 대들보 위에 동자주를 놓고 마루보를 받게 하였으며, 지붕은 홑처마 팔작지붕을 이었다.
 4칸을 나누어 강학용(講學用)의 대청과 유생들의 기숙을 위한 방을 두고, 전면에 툇마루 대신 쪽마루를 둔 평범한 구조의 건물로서 태백산 일대의 마루없는 귀틀집이나 투막집 계통의 유형이 제택형(第宅形)으로 정리된 모습을 보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동린각 경상북도 유형문화제 제 77호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충무공 이순신과 김완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건물로 원래는 자양면 노항동에 세웠으나, 정조 9년(1785)에 불타서 정조 11년(1787)에 다시 지었다. 그 후 세월이 흐르면서 퇴락한 것을 1960년 성곡동으로 옮겨 지으면서 수리하였다. 1976년 영천댐 건설로 인해 지금의 위치로 옮겨지었다. 

가운데 2칸을 대청으로 꾸미고, 뒤쪽 1칸에 신주를 두어 위패를 모시도록 하였다. 기둥은 네모·여덟모·원형 등 세 종류를 사용하여 격조있게 하였다. 지붕을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는 기둥 위에만 배치하는 주심포양식으로 안동과 영천지방에서는 흔히 볼수 있다.

영천 정용준씨 가옥 (연정고택 ) 국가민속문화재 제 107호

살고 계신곳이라 자세히 볼수는 없었고 밖에서 사진만 찍었다

현재의 주인 정용준씨의 8대조가 영조 원년(1725)에 지은 집으로 본채와 정자로 되어있다. 넓은 대지에 연못이 있는 이 집은 안채·사랑채·아래채·곳간채가 ㅁ자 평면을 이루는 서남향집이다. 연못가의 정자는 별당으로서 사랑채 마당가에 따로 떨어져 남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안채는 ‘일심당’이라고 하며 안방·대청·건넌방·부엌·광으로 되어있다. 3칸 크기의 큰 부엌이 안방의 아래로 길게 굽어나가는 'ㄱ'자집의 형식은 영남지역의 큰 주택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구조이다. 외양간·방앗간·광을 가진 아래채는 안채의 부엌·광을 마주보고 있으며 방앗간에는 디딜방아가 설치되어 있다. 대문의 오른쪽으로 위치한 사랑채는 사랑방·대청·광·마루방이 배열되어 있다. 곳간채는 대문의 왼쪽에 위치한다.

마당 밖을 흐르는 작은 계곡 쪽을 넓혀 만든 연못은 인공의 티가 나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럽다. 정자는 넓은 대청과 온돌방으로 되어 있다. 몸채와 정자, 작은 연못의 합리적 구성은 주인의 자연애와 운치있는 생활관, 인생의 지혜를 잘 나타내 준다.

환구 세덕사 경상북도 민속문화제 제87호

임진왜란 때 영천 의병장이었던 호수 정세아(1535∼1612) 선생과 그의 아들 백암 정의번(1560∼1592)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사당이다.

정조 1년(1777) 서재 뒤에 충현사를 지어 향사하고 강학의 도장으로 사용하여 왔다. 그후 사당의 왼쪽에 충효각이 세워졌다.

고종 5년(1868)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철거되어 지금은 충효각과 부속건물 2동만이 남아있다.

환구서원은 임진왜란 때 영천출신 의병장이던 정세아(鄭世雅)선생과 그의 아들 백암(栢巖) 정의번(鄭宜藩)공의 구국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선원사

이곳에는 보물 제 513호인 영천 선원동 철조여래 좌상이 있다

문이 잠겨 있어 보지는 못하고 문화재 사이트에서 사진을 옮겨 본다

통일신라 후기부터 고려시대에 걸쳐 철로 만든 불상이 유행하게 되는데, 영천 선원동 철조여래좌상(永川 仙源洞 鐵造如來坐像)은 안정감 있는 신체 비례와 양감 있는 체구 등에서 통일신라시대 불상양식을 계승하고 있는 고려 초기 불상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머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있고 이마 위쪽으로는 고려시대 불상에서 자주 나타나는 반달 모양을 분명하게 표현하였다. 얼굴은 둥근 편으로 치켜올라간 눈썹, 긴 눈꼬리, 짧은 인중, 꼭 다문 입 등에서 근엄한 인상을 풍기고 있다.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 어깨에만 걸쳐 입은 옷은 매우 얇게 표현하여 신체의 윤곽을 남김없이 드러낸다. 간략한 옷주름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이나 단호사 철불좌상(보물 제512호)처럼 완전히 기하학적이고 도식적인 모습은 아니어서 고려시대 철불좌상의 양식 전개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머리에 표현된 반달 모양, 다소 경직된 얼굴 표현, 간략해진 신체 표현 등에서 고려 초기 불상양식을 대변하고 있는 우수한 철불상으로 주목된다.

영천 선원동 철조여래좌상(永川 仙源洞 鐵造如來坐像)

가볍게 나선 영천호 답사길

문화재를 생각보다 많이 볼수 있어 주머니가 두둑해지는 느낌을 얻었다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