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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空空)의 시선

인상 깊은곳/산_사찰

( 경산 ) 원효 대사의 탄생지 제석사 그리고 자인 향교

空空(공공) 2016. 12. 23.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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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을 다니다 보면 정말 놀랍게도 원효대사의

행적을 여러 군데에서 발견한다

불세출의 승려이신 원효대사가 창건한 사찰만도 전국적으로 자그만치 65개 ( 암자 포함)에 이른다

 

더구나 그것도 경북,경남 지역뿐 아니라 멀리 북으로는 함경남도 신흥군의 개심사로부터 남으로는

전남 강진의 무위사까지 그의 발길이 곳곳에 닿지 않은곳이 없다

정말 놀랍고 존경스러운 일이 아닐수 없

                                  ( 원효 창건 사찰 분포도 : 경산 시립 박물관 )

 

그중에서도 그가 태어난 이곳 경산은 창건한 사찰이 5개가 된다

5개의 사찰중 원효가 태어난 사찰인 제석사를 다녀 왔다

제석사는 깊은 산중이 아니라 자인면 소재지에 위치하고 잇어 여늬 사찰과는 분위기가 조금 다르다

제석사

 우리나라에 불교 성지는 헤아릴 수 없이 많으나 원효성사(元曉聖師, 617~686) 성지(聖地)가 으뜸이다. 원효성사 성지 중에서도 스님이 태어난 곳인 제석사(帝釋寺)가 특별하다. 

원효스님은 신라 진평왕 39년(617년)에 현재 경상북도 경산시 자인면, 서라벌 압량군 자인땅 불지촌에서 태어난다. 스님이 태어난 곳은 집안이 아니라 집이 있는 불지촌(佛地村) 북쪽 밤나무골의 밤나무 아래였다. 밤나무에 남편의 옷을 걸어 가리고 그 속에 누워 해산하여 그 밤나무를 사라수(娑羅樹)라 하고 그 나무 열매를 사라율(娑羅栗)이라 했다. 그런데 이 사라율의 열매는 보통 밤나무와는 달리 그 밤 알 한 톨이 바루에 가득 찰 만큼 컸다고 한다. 

스님은 자기가 태어난 곳과 자기가 살던 집에 절을 지었다. 출가한 뒤에 살던 집을 희사(喜捨)하여 ‘초개사’(初開寺)를 짓고, 태어났던 밤나무가 있는 곳에 사라사(娑羅寺)를 지었다. 제석사(帝釋寺)는 사라사의 후신이라고 한다. 제석사에 남아 있는 석조좌불과 부서진 탑신, 석등 연화대석 등이 신라말기의 것으로 보여지고 있어 사라사의 후신이 제석사임을 짐작케 한다. 

사라사(娑羅寺)의 사라(娑羅)는 신라의 국호인 사로(斯盧)와 같은 음과 뜻으로 사라사는 부처님의 재생(再生)을 이어받은 신라의 절이라는 의미로 해석되기도 한다.
제석사는 신라시대 원효대사가 출가한 후 생가 곁에 지어졌던 사라사가 폐사되었다가 400여 년 전 밭갈이하던 농부가 불상과 탑신을 발견하고 사찰을 복원했다는 설화가 있다. 

원효스님은 제석사에서 태어나 한 번도 울지 않았다고 하며, 태어난지 100일이 되자 눈동자가 밖을 보는 시선이 전혀 없고 내관극념(內觀極念)의 자세라 그 누구도 접근하기 어려운 모습이였다고 한다. 한 살이 되자 몸에서 풍기는 자태가 마치 영웅호걸 장부의 태도라서 감히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기상을 지녔고, 일곱 살이 되자 산에 가서 있기를 좋아해서 조부가 햇빛과 비를 피하기 위해서 초막(草幕)을 지어 주었는데 초계사(草係寺)라 불렀다고 한다.

                                                 ( 대한민국 구석구석에서 인용)

 

 

그리고 근처에 있는 자인 향교를 찾았다

아쉽게도 문이 굳게 닫혀져 있고 내부도 보기 어려웠다

자인향교 : 문화재자료 제 106호

 자인향교는 1562년(명종 17)에 경주부윤 이정(李楨)이 건립하였으나 임란 때 소실되었으며, 1675년(숙종 1)에 도천산 아래로 자리를 옮겨 중건하였다가 1728년(영조 4)에 현위치로 재이건하였다.
 자인초등학교 우측의 얕은 구릉지에 자리잡고 있는데, 배치형태는 모성루(慕聖樓), 명륜당, 내삼문, 대성전을 동일축선상에 둔 전학후묘형을 이루고 있다. 명륜당의 전면에는 동·서재가 있으며 대성전의 전면 좌측에는 제기고(祭器庫)가 자리잡고 있다.
 대성전은 외일출목의 이익공집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맞배기와집인데, 평면은 3칸을 모두 통칸으로 처리하였으며 우주(隅柱)에는 까치발 형태의 활주(活柱)를 세웠다. 활주는 외부로 돌출시킨 장혀를 받고 있으며 하부에는 별도의 주초를 놓았다. 가구는 동자주와 파련대공이 종량과 마룻대를 받게한 2고주 5량가의 견실한 구조이다.
 명륜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맞배기와집인데, 자연석 기단 위에 커다란 막돌주초를 놓은 후 원주를 세워 이익공 주심포집을 구성하였다. 평면은 어칸 3칸을 우물마루로 꾸미고 양측칸에 온돌방을 들인 중당협실형(中堂夾室形)이다. 
 이 건물에서 특이한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측면 기둥의 주두(柱頭)에 익공쇠서가 붙어 있는 것이고, 또 하나는 활주이다. 활주는 자연곡재를 사용하여 상부는 장혀를 받치고 하부는 주초석 위에 얹었는데, 활주를 놓기위한 주초를 별도로 두지 않고 기둥의 주초석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이는 언뜻 보아서는 까치발과 구분이 되지 않으나 기둥의 초석이 워낙 크기 때문에 별도의 초석이 필요치 않는 것으로 생각되어 활주로 보는 것이 타당하리라 생각된다. 
 모성루는 이익공 주심포양식의 2층 누각이며, 평삼문은 삼문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초익공의 겹처마를 하고 있다.                              (경상북도 문화재 사이트에서 인용)

 

제석사 안내 이정표도 제대로 보이지 않고 자인 향교도 문이 닫겨 있고..

이래 저래 지자체에서 좀 신경을 썼으면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