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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空空)의 시선

인상 깊은곳/서원_향교

( 대구 ) 서계 서원, 환성정

空空(공공) 2017. 5. 19. 0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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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얼마전까지 대구시에는

서원이 하나밖에 없는줄 알았다

일전  구암서원소개하면서도

구암서원외에 대구에 서원이

또 있다고는 전혀

생각을 못하다가 우연히 지도를

살펴 보다 뜻밖에 아주 가까운곳에

또 하나의 서원이 잇다는것을

알고 찾아 나섰었다

 

지난 3월 매화가 필 무렵 찾았던

곳이다

문은 잠겨져 있었지만 밖에서도 충분히 잘 볼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 서계 서원 )

서계서원 (西溪書院)은 1781년(정조 5) 지방유림의 공의로 이문화(李文和)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801년(순조 1) 이주(李輈)를 추가 배향하여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왔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가 그 뒤 점차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사우(祠宇), 신문(神門), 동·서 협문(夾門), 3칸의 강학당, 1칸의 서고(書庫), 각 3칸의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주사(廚舍)·대문 등이 있다. 사우에는 이문화와 이주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강학당은 화수정(花樹亭)이라 칭하는데 1924년에 중건된 건물이다. 동재는 금수랑(琴水廊)이라 칭하며 서원 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학문의 토론장소 등으로 사용되며, 문헌과 가보(家寶)를 보관하고 있다. 서재는 희리당(希理堂)이라 칭하여 유생이 강학하는 곳으로 사용하였으며, 창포리에 있는 환성정(喚惺亭)을 서재로 옮겨 왔다. 서고는 부용장(芙蓉帳)이라 하여 유생의 휴식소 겸 숙소로 사용하고 있으며, 주사는 향사 때 제수(祭需)를 마련하여 두는 곳이다. 이 서원에서는 매년 봄과 가을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소장전적으로는『오천실기(烏川實紀)』 외 200여 권이 있다.

                                                      ( 대한민국 구석구석에서 인용)

 

 

환성정은 옮겨온것이다

(환성정)

  1582년에 지어진 환성정은 임진왜란때 대구지방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한 태암(苔岩) 이주선생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건립됐다. 환성정은 정면 3간, 측면 2간, 홑처마 굽도리집으로 건축 양식도 독특하다. 태암선생은 인천 이씨로 이문화 선생의 8대손이다. 태암선생은 과거와 벼슬에 뜻을 두지않고 일찍이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그러던중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태암선생은 서낙재등과 대구 지방에서 의병으로 활약하며 나라에 큰 공을 세웠다. 전쟁이 끝나자 태암선생은 또다시 산림에 자취를 감추고 북구 서변동 지금의 자리에 환성정을 짓고 도(道)를 강론하며 후학을 양성했다. 환성정이라는 현판은 대원군(大院君)이 친필로 하사한 것으로 유명하다. 태암선생은 호연지기가 커 후학들의 추앙을 받았다. 그가 남긴 시에서 이런 그런 호연지기를 느낄 수 있다. 지인흉해무번랑(至人胸海無飜浪), 달사영대불기진(達士靈臺不起塵)-지인의 바다같이 넓은 도량에는 풍랑이 일지 아니하고 달사의 영옥같이 맑은 정신에는 잡념이 일지 아니한다.                  ( 대한민국 구석구석에서 인용)

조금 윗쪽에는 백운정이라고 있는데 별다른 설명은 없다

등잔밑이 어둡긴 어둡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