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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空空)의 시선

인상 깊은곳/서원_향교

( 경산 ) 난포고택,관란 서원,조곡서원

空空(공공) 2016. 12. 2. 0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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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산시 여행지도를 펼쳐 보니 청도방면으로 난포고택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주위 문화재를 보니 몇군데가 보인다 .

특히 서원들이 몇군데 있었다

그래서 이곳으로 목적지를 정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그런데 문을 걸어 잠근곳이 대부분이라 밖에서 볼수 밖에 없었던건 아쉬움으로 남았다

향교,서원,고택은 문이 잠겨 있는곳이 많다

물론 문중에서 관리 하고 관리에 어려움이 있는건 이해를 하지만 내부를 보고 싶은 사람은 볼수 있도록

안내( 연락처) 표기는 좀 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뭐가 중헌지 모르겠다

 

난포 고택 :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 80호

임진왜란 이전에 창건되었다 하고 순조7년(1809)명의 막새기와와 1817년(순조 16)의 상량문이 있어 중수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안채·아랫채·사당채·수오당(守吾堂)이 현존한다.원래는 대문간채·사랑채·중사랑채·고방채·방아실채가 더 있었다 한다. 수오당은 최근세에 용산(龍山)에서 이건하였다 해서 거론되지 않고 있다.난포는 영천최씨시조 최한(崔漢)의 14세손 최철견(崔鐵堅) 아호이다. 난포고택은 그가 1546년(명종 원년)에 창건하였고, 임진왜란 때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난포공실기(蘭圃公實記)』에 전한다.난포는 전라도사(全羅都事)를 지냈고 임진왜란때는 70 고령인데도 창의하여 대장이 되고 손자 최인수(崔仁壽), 증손자 최준립(崔竣立)과 함께 영천 권응수(權應銖)의병과 합세,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였다.난포고택은 넓은 마당에 서향한 안채가 있고 좌측에 남향한 아랫채·안채·뒷쪽 동남으로 사당이 있다. 안채는 -자형, 향좌측에서부터 부엌 2칸, 안방 1칸, 대청 2칸, 작은방 1칸, 마루방 1칸 순이다.간방통(間半通)으로 앞퇴가 있고 안방 뒷벽엔 그미다락이 있다. 이집 특색은 마루도 문짝을 달아 폐쇄하였다는 점이다. 마당에서 바라다 보면 부엌은 널문, 안방 건너방은 머름 위에 두짝 띄살창, 대청은 두짝의 띄살문 분합, 마루방은 외짝살대문이다.홑처마 맞배지붕인데 좌우 끝에 가적지붕을 덧달이 마감하였다. 영천경산지역의 특성인 지붕형태이다. 사당은 정면 2칸, 측면 1칸 앞퇴 없는 가묘형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이게 사당채인듯 하다

까치발로 간신히 찍었다

문은 이렇게 닫혀 있고

담장밖에서 돌덤에 올라서 찍은 사진

안채인것 같다

수오당

다음 찾은곳은 네비게이션에도 나오지 않아 포기할려 했었던 관란 서원이다

가는길에 다행히 표지판을 볼수가 있었다 ( 좀 지나쳐 다시 돌아 오긴 했지만)

이곳은 다행히 관리하시는분이 바로 서원밑에 주거를 하고 계셨

찾아 오는 사람이 별로 없는지 약간 경계를 하셨다

이곳은 이언적 선생을 배향한곳이나 복원한지가 얼마 안되어서인지 아무런 문화재 지정은

안 되어 있다

관란 서원
관란(觀瀾) 이선생(李先生:諱 承會) 문집에 “금학산 아래에 맹구대(盟鷗臺)와 삼회당(三會堂)의 옛터가 있으니 이는 관란 이선생이 강론하던 곳이라고 전하여 오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이곳이 지금의 관란서원 터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관란서원은 1660년(현종 1)에 지방유림들의 공의로 이언적(李彦迪)의 도덕과 학문을 추앙하여 창건하였다. 그 뒤 1715년(숙종 41)과 1743년(영조 19)에 사당을 중수하였다. 1868년(고종 5)에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10년 맹구대와 삼화당이 있던 자리에 건물을 복원하여 서당으로 활용하였다. 언제부터 서원으로 승격되었는지도 잘 모르나 유림에서 단비(檀碑)를 세우고 해마다 중구일(重九日: 9월 9일)에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선생의 향사를 받들고 있다.
현재의 관란서원 건물은 1910년(上之卽位三十八年七月初六日己已酉時竪柱上樑)에 건립되었으며 현판은 1923년(癸亥中冬)에 후학 윤현기(尹玄基)가 썼다. 현재 김효기(金孝基) 원장이 수임(首任)을 맡아 역대 원장의 사업을 이어 받아 서원관리에 힘쓰고 있다. 1994년 경산시로부터 1,800만원의 예산지원을 받고 유림에서 출연하여 현대식 관리사를 훌륭히 건립하였다. 2004년에는 사당을 복원하였다.

                                                ( 서원 연합회에서 인용)

놓치고 지나갈뻔 했던 이정표

이정표에서 좁은 길을 오르는데 얼마나 맹렬하게 짖던지 돌아갈뻔 했다

묶여 있는데도 줄을 풀고 달려 들것만 같았다

처음에는 잠겨 있는줄 알았는데 옆문이 있었다

안인사

앞에 흐르는게 오목천인데 길가에 장독대들이 있어 신기했다

빈 장독대일까? 궁금했다는..

마을 나무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190년된 회화나무 ( 1982년 지정 11-10 남산면 송내리)

 

다음은 조곡서원을 아 갔는데 역시 문이 잠겨 있고 줄이 없는 개가 사납게 짖는 관계로

쫒겨 나듯이 서둘러 나오고 말았다

조곡서원

 자인의 유림과 탐진 안씨 후손이 그 선조 오성군(鰲城君) 안우(安祐)와 그 4세손인 문정공(文靖公) 안지 (安止)를 배향하기 위해 정조 18년(1794년)에 건립한 서원으로, 경산시 남산면 조곡리 분도등에 위치하고 있다. 서원의 산형대문(山形大門)을 들어서면 마당 건너편에 강당(講堂)인 상경재(尙敬齋)가 자리 잡고 있다. 팔작기와집인 강당의 좌우에는 동재(東齋)와 서재(西齋)가 있고, 강당 뒤쪽으로는 사당인 충현사(忠賢祠)가 있다. 매년 3월 상정에 배향한다.

                                                             ( 대한민국 구석구석에서 인용)

여기는 담장이 높아 안을 전혀 들여다 볼수가 없었다

전화번호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언제 개문하는지 물어나 보게..

요 견공이 얼매나 짖어 대는지..

목줄도 없고 해서 쫄아서 뒷걸음 치며 빠져 나왔다

아직 못 가본데가 용계서원,도동서원이다

다음 경산을 찾을때 가볼 예정이다

 

그때는 개문되어 있으면 하는 바램이다